--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제50회 칼미크 한국

김현일 연구위원

2018.09.07 | 조회 8389

유목민 이야기 50

칼미크 한국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나라이다. 모스크바 공국이 영토를 확대하면서 다양한 소수 민족들이 모스크바 공국에 편입되었다. 모스크바 공국은 17세기에 많은 소수민족을 거느린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러시아의 영토 확장은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현재 러시아에는 이러한 소수민족들의 자치공화국이 22개나 있다. 그 이름을 보면 매우 생소하다. 전문가가 아니면 어디 있는지조차 짐작하기 힘든 곳들이 많다. 독자들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들 때문에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체첸 공화국은 아마 들어보았을 것이다. 카프카즈 산지에 위치한 체첸 공화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칼미크 공화국이 있다. 물론 칼미크 공화국은 산지에 있는 것은 아니고 볼가 강 연안의 스텝 지역에 있다. 이 자치공화국의 주민은 10여만 명을 간신히 넘는데 그 대다수는 물론 칼미크 인들이다. 이들은 주변 지역의 주민들과는 완전히 계통이 다른 몽골족의 후예이다. 종교도 라마교 즉 티베트 불교가 가장 널리 퍼진 종교라 한다. 어떻게 해서 몽골 후예들의 자치공화국이 유럽 땅에 생겨나게 되었던 것인가?

칼미크 공화국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원나라가 명에 의해 중국에서 쫓겨나는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나라는 중국사서에서 순제(順帝)라고 불려진 11대 황제 토곤 테무르 때 망한다. 쿠빌라이의 후손인 토곤 테무르는 고려 여인 기황후의 남편이기도 하다. 토곤 테무르는 중국에서 쫓겨나 1370년 내몽골 지역에 있는 시라무렌 강 근처의 응창(應昌)이라는 곳에서 죽었다. 이렇게 몽골 초원으로 쫓겨간 몽골족의 나라가 북원(北元)이다. 그러나 북원은 토곤 테무르의 손자 토구스 티무르의 군대가 명나라 군대에 의해 격파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로부터 20여년 간의 혼란이 있는 후 몽골 초원에는 두 개의 세력이 흥기하게 되었다. 하나는 칭기즈칸의 후손들이 통치하는 동몽골(중국인들은 이를 달단 즉 타타르라 하였다) 서쪽은 오이라트였다. 두 세력은 서로 몽골의 지배를 놓고 다투었는데 초기에는 오이라트가 우세하다가 15세기 말에는 칭기즈칸의 후예인 타타르의 다얀 칸이 몽골을 통일하였다. 다얀 칸은 몽골인들을 모두 여섯 개의 만호로 편제하였는데 자신의 아들들을 친왕(親王)이라는 이름으로 만호의 지배자로 삼았다. 세력을 회복한 몽골은 그의 손자 알탄 칸 때에는 명나라의 수도 북경까지 쳐들어간 적도 있었다. (1550년의 경술지변)

오이라트는 한자로는 와랄(瓦剌)로 표기하는데 이들은 예니세이 강 상류지역에서 바이칼 호에 걸친 서부 몽골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서몽골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네 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오이라트는 4부족 연맹이었던 셈이다. 초로스(후에 중가르로 불린다), 두르베트, 호쇼트 및 토르구트의 네 부족이다. 명나라는 칭기즈칸 가문이 지배하는 동몽골보다는 오이라트 세력이 몽골 초원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중국과 더 멀리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였을 것이다. 오이라트 역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중국보다는 서남방 쪽, 즉 알타이 산지와 타림 분지 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기를 원했다. 15세기 초 오이라트의 수령 토곤과 그 아들 에센은 모굴리스탄과 충돌하게 되었다. 모굴리스탄은 차가타이계의 몽골족이 지배하던 몽골제국의 후계국이다. 싸움에서 오이라트는 줄곧 우세하여 모굴리스탄의 칸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그가 칭기즈칸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극진한 대접을 하였다. 토곤과 에센은 왕이나 마찬가지 존재였지만 자신들의 칭호를 대장군이라는 뜻의 타이시’(한자로는 大師)로 만족하였다. 몽골족에게는 칭기즈칸의 후손만이 칸이 될 수 있다는 뿌리 깊은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센 타이시 (?-1455) 때에 오이라트 세력은 절정에 달했다. 중국의 북변에서부터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 서쪽으로는 발하쉬 호까지 지배하였다. 오이라트 제국은 중국에도 위협을 가했다. 중국사에서 토목보의 변’(1449)이라 불리는 사건인데 중국의 대우에 불만을 가진 오이라트 군대와 명이 싸워 명나라 군대가 참패하고 영종이 포로로 잡힌 사건이다. 오이라트는 서쪽의 카자흐 족과 트란스옥사니아의 투르크계 부족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투르크인들은 이 오이라트 몽골족을 칼미크라고 불렀다. 칼미크라는 말은 남은 자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주변의 투르크족들이 붙여준 이름 즉 자칭이 아니라 타칭이다.

오이라트는 17세기 초 혼란에 빠졌다. 동몽골의 강성이 가져온 결과였다. 동쪽에서 강력한 세력이 일어나자 그 서쪽에 사는 유목민 부족들이 차례로 압박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하거나 도주하는 현상은 역사적으로 여러 번 나타난 현상이었는데 이번에도 그 양상이 비슷하였다. 동몽골의 알탄 칸에 의해 16세기 후반 동몽골이 흥기하자 오이라트의 초로스 부가 예니세이 강 상류 지역으로 밀려나고 그곳에 있던 토르구트 부가 다시 서쪽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정치적 상황 외에도 가축이 늘어나 초지가 부족해진 경제적 요인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토르구트 부를 이끌고 있던 수령 코 우를룩은 예니세이 강 상류와 중가리아 즉 천산 산맥 북부 초원지대를 버리고 서쪽으로 이주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런데 당시 서시베리아에는 러시아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코 우를룩은 러시아 세력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유의하였다. 그는 16069월 타라 총독에게 사절을 보내 이르티쉬 강 상류에서 유목을 하고 또 교역을 할 수 있도록 러시아 측의 허락을 받으려고 하였다. 이것이 러시아와 오이라트의 최초의 공식적 접촉이었다. (Maksimov, 6) 러시아 당국은 러시아 영토 내로 와서 유목하는 경우 차르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차르의 종주권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요구를 토르구트 부는 받아들였다.

20만 이상의 무리를 이루었던 토르구트 인들은 서진하는 동안 카스피 해 근처에서 카자흐 인들, 그리고 아스트라칸 근처에서는 노가이 인들의 저항에 부닥쳤지만 이들을 모두 무찔렀다. 불만을 가진 다른 오이라트 인들도 토르구트 집단에 가담하였다. 토르구트 인들은 1630년대부터 볼가 하류 지역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이들의 나라는 칼미크 한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는 차르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차르에 충성을 선서한 칼미크 한국은 이용가치가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남부 지역을 빈번하게 침략, 약탈하던 크림 타타르와 쿠반 지역의 노가이 족으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칼미크 인들을 이들과의 싸움에 동원하였다. 특히 칼미크 인들은 라마교를 신봉하던 불교도였기 때문에 회교도 크림 타타르와 노가이 족과 싸우는 데는 적격이었다.

러시아는 1655년 칼미크 한국과 공식협정을 체결하였다. 문구상으로는 칼미크 족의 우두머리 즉 타이시는 차르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는 신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칼미크 족은 러시아와 대등한 동맹이었다. 적어도 칼미크 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칼미크 인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칼미크의 우두머리에게 끊임없이 선물을 보내고 회유해야 하였다. 칼미크 인들이 크림 타타르 편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칼미크가 다른 외부의 세력과 접촉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지만 칼미크는 계속해서 크림 한국과 카프카즈 지역과 접촉하였으며 심지어는 오토만 제국과 페르시아에도 사절을 파견하였다. 러시아는 칼미크의 이러한 행태를 배신으로 보고 코사크와 노가이를 부추겨 칼미크를 공격하게 하였다. 러시아판 이이제이 정책이었다. 그러자 칼미크의 아유키 칸(1669-1724)은 카잔과 우파 지역을 공격함으로써 보복하였다. 칼미크 족이 만만한 존재가 아님을 과시한 것이다. 18세기에 들어 칼미크는 남러시아를 넘어서는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동쪽으로 눈을 돌려 바쉬키르, 카자흐 족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러시아와 오토만 제국 뿐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청나라와 티베트도 칼미크에게 구애의 손짓을 보냈다.

참고문헌

Michael Khodarkovsky, Russia's Steppe Frontier : The Making of a Colonial Empire, 1500-1800 (Indianan University Press, 2002)

Konstantin Maksimov, tr. by Anna Yastrzhembskaya, Kalmykia in Russia's Past & Present National Policies & Administrative System (Central University Press, 2008)

루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사계절, 1998)

김호동,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사계절,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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