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

유목민 이야기 제48회 카잔 한국의 멸망

김현일 연구위원

2018.08.02 | 조회 159

유목민 이야기 48

카잔 한국의 멸망

 

 

러시아사에서 1552년 카잔 한국 정복은 중요한 사건이다. 카잔 정복으로부터 스텝 지역에 대한 모스크바의 정복과 지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또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를 정복하게 만들었다. 요컨대 카잔 정복은 모스크바 공국이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제국으로 도약하는 도약대였다. 모스크바 대공은 카잔 정복 이후 전러시아의 차르로 자신을 내세우게 된다.

물론 모스크바가 카잔 한국을 정복하기 전에 모스크바와 카잔은 근 백년 이상 싸움을 하였다. 카잔 한국을 세운 울루그 마흐메드부터 모스크바와 전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은혜를 베풀어 권좌에 올랐던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가 자신에게 보여준 배은망덕함을 잊지 않았다. 마흐메드 칸은 80 명이 넘는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쳐들어간 것이다. 그가 눈물을 머금고 모스크바 땅에서 쫓겨나 카잔에 와서 정착했을 때 거느린 병력은 3천에 불과했으나 정착 후 인구가 급속히 늘었다. 전에 버려져 있던 카잔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카잔은 볼가 강이라는 오랜 교역로 상에 위치해 있었을 뿐 아니라 땅도 비옥하였다. 카잔 한국이 초기 로마와 비슷하게 주변의 온갖 부랑아들을 불러모아 인구를 늘리는 정책을 썼다는 이야기도 있다.

울루그 마흐메드는 모스크바 공국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가 포로로 잡혔는데 뜻밖에도 울루그 마흐메드 칸은 그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몸값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다음부터는 자신을 우호적으로 대하라는 말과 함께 그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심지어는 바실리 2세가 그의 정적에 의해 눈알이 뽑힌 채 왕좌에서 쫓겨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바실리에게 권력을 되찾아주기까지 하였다. 아마 칸의 이러한 관대한 태도가 사람들을 카잔으로 불러 모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모스크바의 이반 3(재위 1462-1505) 때에는 모스크바가 우위를 잡았다. 카잔 한국 내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사람이 모스크바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자 이반 3세는 군대를 보내 그를 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모스크바는 카잔 한국의 권력투쟁에 개입하였다. 이반 3세는 자신이 정해준 칸이 배은망덕하게 굴자 그를 새로운 칸으로 갈아치우기까지 하였다.

이반이 권좌에 앉혀준 인물인 무함마드 아민 칸이 후손이 없이 죽자 이제 크림 한국의 기라이 가문도 자신들이 카잔 한국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싸움에 끼어들었다. 카잔 한국은 러시아파와 크림파로 갈려 대립하였다. 새로운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3세는 카시모프 한국 왕가의 쉭 알리를 칸으로 세웠다. 그러자 크림 한국의 칸 무함마드 기라이가 쉭 알리를 내쫓고 자기 동생 사히브 기라이를 칸으로 앉혔다. 기라이 가의 수중에 두 나라가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유리한 정세를 이용하여 무함마드는 모스크바 공국을 침공하였다. 러시아로부터 공납을 바칠 것을 약속받는 한편 많은 포로를 데리고 귀환하였다. 무함마드가 크림 반도를 침공한 노가이 한국 군대에 의해 살해되자 크림 한국의 칸 자리에 사히브 기라이가 자신의 아들 사파 기라이를 앉혔다. (노가이 한국은 14세기 말 톡타미쉬 칸의 장군이었던 에디게이가 톡타미쉬 칸에 반기를 들고 금장한국에서 분립한 나라이다. 영토는 한 때 흑해 북부로부터 우랄 산맥 일대에 걸쳐 있었다. 노가이 한국의 주민들의 주력이 몽골계 망기트 족이었다. 노가이인들은 크림 한국과 손을 잡고 슬라브 정착민들에 대한 약탈원정과 노예사냥을 빈번히 감행하였다.) 사파 기라이의 사후 모스크바 공국은 쫓겨났던 쉭 알리를 칸으로 세웠으나 카잔 인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이번에는 아스트라칸 한국의 왕자인 예데게르가 새로운 칸이 되었다. 바로 이 사람 때 카잔이 모스크바에 의해 최종적으로 정복되었다.

카잔을 정복한 모스크바 대공은 이반 4(1530-1584)이다. 후대에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탄압한 공포정치의 행하여 이반 뇌제雷帝라는 별명을 얻었던 이반은 세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왕이 되었다. 물론 부왕이 지명한 인사들로 구성된 섭정회의가 통치를 하다가 이반이 성인이 된 17세에 차르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카잔 전쟁은 그로부터 2년 후에 일어났다. 1549년 사파 기라이가 두 살배기 아들만 남긴 채 죽었는데 그로 인한 카잔의 내부적 혼란을 이용하여 모스크바 공국이 카잔을 침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격은 날씨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11월에 출정한 러시아군은 카잔 성벽 앞까지 진출하여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는데 당시 카잔 성벽은 목책으로 되어 있었다. 승리를 눈앞에 두었으나 갑자기 날씨가 돌변하였다. 강을 덮고 있는 얼음이 꺼지고 비가 억수같이 내려 수레가 움직일 수 없었다. 보급품 수송이 불가능해졌다. 러시아군은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퇴각하였다.

다음해 이반 4세는 카잔을 바라보는 볼가 강 건너편에 강 한가운데로 비죽 반도처럼 나와 있는 곳에 요새를 건설하도록 하였다. 불과 4주 만에 세워졌다는 스비아가 요새이다. 카잔 시를 위협하는 요새가 뚝딱뚝딱 세워지는 것을 본 주변의 추바슈, 케레미스, 모르드바 부족이 모두 모스크바 편으로 넘어왔다. 이들은 모스크바 군대에 합류하였다. 포위된 카잔은 결국 항복하였다. 볼가 건너편의 영토를 넘겨주고 황후와 어린 아들은 모스크바로 보내야 하였다. 모스크바에 충실한 쉭 알리를 새로운 칸으로 받아들이고 6만명에 달하는 러시아인 포로를 석방해야 하였다. 그러나 일부 카잔 귀족의 선동으로 카잔인들은 항복 약속을 뒤집어버렸다. 저항을 선택한 것이다.

이반은 카잔을 강력하게 응징하는 방도를 택했다. 당시 이반 4세가 고용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인 기사의 제안으로 높은 탑 모양의 포대를 만들고 그 위에 대포를 설치하였다. 무려 60문의 포가 장착이 되었는데 카잔 성벽 높이보다 포의 위치가 더 높았다고 한다. 포대는 성벽 근처까지 접근하였는데 양자 사이에는 20 피트 폭의 해자만이 있었다. 그러나 카잔 군도 소총으로 반격하여 포대는 성벽을 허무는 데 실패하였다.

대포가 못한 것을 폭약이 하였다. 성벽 밑에 갱도를 파고 폭약을 설치하여 폭발시켰는데 이로써 성벽이 뚫렸다. 카잔 시내로 들어간 모스크바 군인들은 이 부유한 도시가 갖고 있던 부를 약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회교도인 카잔 인들은 기독교도들의 노예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던지 항복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다. 마침내 칸 예데게르는 모스크바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로 끌려갔지만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다. 젊은 이반 4세는 아직은 포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린 예데게르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시메온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반 4세는 1564년 말 느닷없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그 자리를 이 시메온 베크불라토비치에게 물려주었다. 러시아인들을 충격에 빠뜨린 이반 4세의 이러한 양위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여러 가지 해석이 대립한다. 사랑하던 왕비 아나스타샤가 죽은 이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양위했다는 주장, 그 해에 차르로 남아 있으면 죽게 된다는 점성술사의 말을 믿고 양위했다는 주장 등도 있지만 자신의 통치에 여러 가지 명목으로 반대를 일삼는 귀족과 교회 세력을 격파하기 위해 시메온을 일시적으로 차르로 만들어 이용했다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좌우간 카잔 한국의 패망군주였던 예데게르는 몇 개월에 불과하였지만 전러시아 황제 자리에도 오르는 이상한 운명을 맛본 사람이었다. 그는 후일 권력과 영지를 박탈당한 후 강제로 수도원에 유폐되었다가 1616년 모스크바에 있는 한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죽었다.

카잔 함락 이후 살아남은 타타르인들은 시에서 모두 쫓겨났다. 그들은 전쟁에서 졌지만 모스크바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스크바에서 파견한 총독은 타타르인들의 반란을 막지는 못했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1555년에야 주교구가 설치되었다. 카잔시의 모스크들은 모두 파괴되고 교회와 수도원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시내에는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관리들과 군인들이 자리잡았다. 쫓겨난 타타르인들은 교외로 나가 카반 호수 근처에 정착하였다. 타타르인들의 신도시가 카잔 성벽 밑으로 흐르는 카잔카 강 건너편에 세워졌다.

카잔은 시베리아와 아시아로 나아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이 번창하였다. 러시아 도처의 상인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는데 특히 시베리아에서 나는 모피가 중요한 물품이었다. 겨울이 길고 추운 러시아에서 모피는 가장 중요한 의류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모피는 의류산업의 주종에 속한다. 이곳에서 많은 양의 모피가 거래되어 주민들에게 부를 안겨다 주었다. 또 유목민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가축의 산물을 이용한 제조업도 번성하였다고 한다. 양초제조업이 그 일례였다. 19세기에 카잔에 관한 책을 남긴 영국인 투르네렐리에 의하면 카잔은 모스크바 공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후에도 상공업을 통해 지방 도시들 가운데서는 견줄 도시가 없을 정도로 부유한 도시로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참고문헌

 

Edward Tracy Turnerelli, Russia on the Borders of Asia : Kazan, the ancient capital of Tartar Khans, vol.1 (1854)

Nikolaj Karamsin, Histoire de l'Empire de Russie, vol. 8 (1820)

Isabel de Madariaga, Ivan the Terrible (2005, Yal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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