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

유목민 이야기 제47회 킵차크 한국의 계승국가들

김현일 연구위원

2018.07.11 | 조회 184

유목민 이야기 제47

 

킵차크 한국의 계승국가들

 

금장(킵차크) 한국은 1420년대와 1430년대 그 지배층의 내란으로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예전에도 여러 칸들의 분립한 일이 있었지만 그 분열은 지속적이지는 않았다. 15세기 초반에 일어난 분열로 금장한국은 완전히 여러 나라로 분할되었다. 이러한 분열의 주역들은 모두 투카 티무르 가문 출신이다. 투카 티무르는 주치의 막내아들인데 그 후손들은 금장한국에서 눈에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동서로 분열되었던 금장한국을 1380년 통일한 톡타미쉬 칸부터 두드러진 역할을 하게 되었다. 분열의 주역은 세 사람이다. 한 사람은 울루그 마흐메드, 그리고 그의 조카 다블렛 베르디, 그리고 톡타미쉬의 아들 사이드 아메드였다.

제일 먼저 분립한 것은 크림 한국이다. 크림 한국은 다블렛 베르디가 세웠는데 금장한국이 내분에 빠지자 그는 혼란을 틈타 크림 반도를 장악하였다. 울루그 마흐메드의 반격으로 곧 그곳에서 축출되었다. 그러자 당시 동구의 강국 리투아니아로 망명하여 리투아니아 대공 비토타스(폴란드와 서구에서는 비톨드로 통용되었다)와 우호관계를 쌓았다. 크림 한국의 초대 칸 하지 기라이(Haji Girai)가 바로 이 다블렛 베르디라고 하는데 왜 이름을 이렇게 바꾸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크림 칸의 시의 노릇을 했던 한 프랑스 의사의 설명에 따르면 어린 다블렛 베르디가 난을 피해 사람들 몰래 한 농민의 손에 컸는데 그 농민의 성이 기라이였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블렛 베르디로부터 시작된 크림 한국의 기라이 가문은 1787년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크림 한국이 러시아에 합병될 때까지 왕좌를 지켰다. 금장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다른 한국들이 16세기에 하나 둘씩 사라진 것과는 달리 2백년 이상 수명이 길었던 것이다.

하지 기라이가 리투아니아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아서였는지 그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인들에 대해 아주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폴란드 귀족들을 궁정에 데리고 있었으며 크림 반도의 무역중심지 카파에 오는 폴란드 상인들을 신경 써서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Howarth, History of the Mongols, Part II, 450)

고대부터 크림 반도에는 그리스인들 뿐 아니라 고트족과 슬라브족, 서돌궐 제국 시대에는 투르크족이 유입되어 다양한 종족들이 섞여서 살게 되었다. 몽골이 1340년 이후 이곳을 점령하면서 크림 반도는 금장한국에 속하게 되었다. 훈족도 케르치 해협을 건너 이곳을 통과하여 다뉴브 하류로 향했다고 한다.

남러시아 초원지대에서 흑해로 삐죽 나와 있는 반도인 크림 반도는 넓이도 상당히 넓어 경기도와 강원도를 합친 면적만큼 된다. 구소련 시절 우크라이나 영토에 속했지만 2014년 러시아가 무력으로 합병하였다. 최근에는 푸틴 대통령이 케르치 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하여 러시아 본토와 직접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제정 러시아 시절에 러시아 영토였던 이 크림 반도가 친서방 쪽으로 기울고 있는 우크라이나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타타르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이들은 2014년 러시아에 의한 합병에 반대하였다. 이들 -- 아니 그 부모들 -- 은 구소련 시절에 소련 당국에 의해 크림 반도에서 쫓겨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가 소련 붕괴 후에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러시아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1430년에 분립한 크림 한국의 뒤를 이어 카잔 한국이 1438년 세워졌다. 건국한 사람은 킵차크 한국의 칸이었던 울루그 마흐메드이다. 그가 주치의 큰 아들 오르다의 후손 쿠추크 마흐메드 -- 마흐메드라고 불렸다 -- 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하여 북부의 러시아인들에게로 도망했는데 러시아인들은 그를 내쫓아 버렸다. 러시아인들로부터 퇴짜를 맞은 그는 동쪽으로 갔다. 예전 불가리아 제국이 있던 볼가 중류로 가서 카잔을 복구하고 그곳에 정착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카잔 한국이다. (1438-1552)

그런데 러시아 역사가 베르나드스키는 카잔에 정착한 인물은 울루드 마흐메드가 아니라 그 아들 마흐무드였다고 한다. 마흐무드는 부친을 죽이고 형제들은 내쫓았는데 이러한 마흐무드의 행위에 환멸을 느낀 타타르 귀족들은 마흐무드와 대립하고 있던 사이드 아메드를 칸으로 떠받들게 되었다. 당시 사이드 아메드는 크림과 드네프르 강 동쪽의 스텝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를 드네프르 한국이라고 한다)

마흐무드가 정착한 볼가 강 중류의 카잔 지역은 앞에서도 소개하였던 불가르 인들의 나라 대불가리아가 있던 곳이다. 하워드에 의하면 이 옛 불가리아 지역은 주치가 투카 티무르에게 준 영지였다고 한다. 그러니 울루그 마흐메드가 새로운 땅을 정복한 것은 아니고 가문의 영지 일부에 정착한 것이다. 이곳에 남아 있던 불가르 인들은 이후 카잔 한국의 타타르인들과 하나가 되었다. 카잔 한국은 공포정치로 악명 높은 이반 4세에 의해 1552년 모스크바 공국에 합병되었다. 현재도 카잔은 타타르인들이 주민의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아마 독자들은 이번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한국 팀이 세계 랭킹 1위인 독일 팀을 꺾은 곳으로 기억할 것이다.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의 수도이다.

아스트라칸은 볼가 강의 하구에 가까운 곳으로 카잔에서부터는 거의 1,200 km가 넘는다. 타타르인들은 시트라칸이라 불렀다. 하워드에 의하면 시트라칸의 원래 이름은 하지 타라칸이었다고 한다. 이곳을 방문하였던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한 터키 순례자가 그곳에 정착하자 술탄이 그곳을 면세지역으로 선포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곳은 상업이 번창하여 대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언제 때 일이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곳을 중심으로 한 아스트라칸 한국 역시 15세기 중반 칭기즈칸 후손들의 권력투쟁 결과 생겨났다. 즉 쿠추크 마흐메드 칸의 두 아들이 서로 싸워 그 한 명인 마흐무드가 사라이에서 밀려나자 아스트라칸으로 가서 그곳에 한국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1466) 이 아스트라칸은 오늘날의 아스트라칸과는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1472년 모스크바 공국이 사라이를 공격하여 파괴하자 아스트라칸 시가 상업중심지로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아스트라칸 칸은 볼가 강 하구 스텝 지역 뿐 아니라 그에 면한 카프카즈 지역도 지배하였다. 아스트라칸 한국은 카잔이 점령된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 공국에 의해 합병되었다. (1557)

카심 한국이라는 나라도 있는데 다른 한국들과는 달리 모스크바 공국의 제후국이었다.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2세가 타타르인들의 침략과 약탈원정을 방어하기 위해 오카 강 남쪽의 땅을 카심에게 주어 제후국으로 삼았던 것이다. 카심은 아스트라칸 한국의 마흐무드의 아들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카심에게 주어진 지역에는 러시아인들은 별로 살지 않고 핀족 계열의 모르도바 인들이 주로 살고 있어 타타르인들에게 그곳을 영지로 주는 데 대한 저항은 없었다고 한다. 오카 강에 접한 카시모프가 그 수도라서 카시모프 한국이라고도 한다. 모스크바 대공은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막는다는 일종의 이이제이 정책을 쓴 것이다. 카심 한국은 모스크바 공국의 충실한 제후 노릇을 하다가 여왕인 파티마 솔탄이 죽자 폐지되었다. (1681) 물론 그 이전 이반 4세 때부터 모스크바에서 파견한 총독이 실권을 행사하면서 카심 한국의 칸은 실권은 상실한 명목상의 칸에 불과하였다.

또 시비르 한국도 있다. 이는 주치의 다섯 째 아들인 쉬반의 후손 아불 카이르 칸에 의해 세워진 한국이다. (1428) 우랄 산맥 동쪽의 서부 시베리아 일대에 위치해 있었는데 후일 시베리아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16세기 말 모스크바 공국이 용맹한 코사크인들을 앞세워 시베리아 정복에 나서면서 멸망하였다. (1582)

 

참고문헌

 

Henry Howarth, History of the Mongols from the 9th Century to the 19th century. Part II The So-called Tartars of Russia and Central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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