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

유목민 이야기 41회 "칭기즈칸의 손자" 일칸 훌레구

김현일 연구위원

2018.02.21 | 조회 668

유목민 이야기 41

 

"칭기즈칸의 손자" 일칸 훌레구


 

훌레구(1218-1265)는 칭기즈칸의 손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인 톨루이의 셋째 아들이었다. 톨루이의 아들들은 모두 세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첫째는 앞에서 이야기한 몽케 대칸이고 둘째는 중국을 통치한 쿠빌라이 대칸이었다. 이 글의 주인공 훌레구는 일 한국을 세운 사람이고 넷째인 아릭부케는 자신의 형인 쿠빌라이와 대립하면서 일시적으로 대칸의 자리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톨루이의 아들들은 그 외에도 몇 명이 있었지만 이들 네 명처럼 중요한 인물은 아니다. 몽케를 비롯한 네 사람 모두 톨루이의 정실부인인 소르칵타니가 낳은 아들들이다. 케레이트 부족 출신이었던 소르칵타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이 때문이었던지 그 아들들은 대부분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1251년 쿠릴타이 회의의 결정으로 몽케가 대칸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 회의에서 몽케는 동방과 서방을 향한 원정을 동시에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바투의 원정(1236-1241)에 이은 두 번째 서방원정이었다. 동쪽의 중국 원정에는 몽케가 직접 나서고 서방 원정에는 동생 훌라구가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이전 중앙아시아의 사정을 간략히 말하자면 중앙아시아와 이란 동부의 호라즘 왕국은 칭기즈칸 생전인 1220년대에 이미 정복되었고 셀주크 투르크는 1243년에 패배하여 몽골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동 지역에 대한 몽골의 지배는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이스마일 파라고 불리는 시아파의 일부 세력이 이란북부의 산악지대를 무대로 이교도들과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 회교군주들에 대한 테러를 일삼고 있었다. (이 일파는 아사신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암살범을 뜻하는 영어의 ‘assassin’이라는 단어는 이들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또 바그다드에는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이슬람 신자들의 최고우두머리로 엄연히 살아 있었다.

훌레구 원정대는 125310월 카라코룸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윌리엄 루브룩이 도착하기 두 달 전이었다. 철저한 준비와 계획을 갖춘 원정이었다. 성벽도시를 공격하기 위한 공성기를 다룰 중국인 기술자들을 1천조나 데려갔는데 가연성 물질인 나프타를 바른 돌을 쏘는 투석기도 있었다고 한다. 또 본대에 앞서 연도에서 식량과 마량을 징발하고 도로와 교량을 정비할 선발대도 파견하였다.

몽골 원정군은 1256년 새해 첫날 옥수스 강(아무다리야)을 건넜다. 먼저 엘부르즈 산맥에 은거하던 아사신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험준한 산지에 있어 독수리 둥지로 불린 이들의 요새들이 모두 함락되었으며 저항하던 자들은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1258년에는 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격, 함락하였다. 칼리프에게는 아사신들에 대한 전투에 병력을 지원하지 않았던 것을 질책하면서 바그다드 성벽을 허물고 칸에게 와서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칼리프 무스타심은 압바스 왕조는 부활의 날까지 굳건히 유지될 것이며 동서의 무슬림들이 달려와 자신을 지킬 것이니 그대는 호라산으로 물러가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한 주일 간의 포위공격으로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칼리프는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는 약탈당하고 5세기 동안 축적되어 왔던 문화유산들과 함께 궁전과 모스크 등이 불탔다. 그리고 무스타심은 인근의 마을로 끌려가 말발굽에 밟혀 죽었다. 왕가의 모든 남자들이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 항복하지 않는 도시들에는 무자비한 학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그다드에는 기독교도들 즉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교와 함께 모두 교회에 모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바깥에서는 무슬림들에 대한 학살이 진행되고 있을 때 교회에 모인 기독교도들은 온전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훌레구가 기독교도들에 대해 이처럼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데에는 회교 세력과의 전쟁에서 기독교도들을 몽골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당시 그의 원정군에는 기독교도인 그루지아 병사들과 아르메니아 병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바그다드 함락을 이슬람에 대한 통쾌한 복수로 간주하였다. 당시에 팔레스타인의 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유럽의 십자군 세력들도 몽골군이 팔레스타인까지 정복하여 성지를 회교도들의 수중에서 해방시켜줄 것을 기대하였다.

훌레구는 바그다드 함락 후 일단 그 본영이 위치한 아제르바이잔 지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새로운 원정을 위한 준비작업을 하였다. 40만에 달하는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 그의 원정 목표는 이번에는 아유브 왕조가 지배하던 시리아였다. 그런데 당시 시리아는 통일된 왕국이라기보다는 여섯 개의 제후국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들은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란, 에데사, 알레포 등이 차례로 함락되고 팔레스타인에 가까운 다마스커스가 함락되었다. 이 도시에는 몽골군 선봉대장인 키트부카와 함께 아르메니아 왕 헤툼(영어로는 헤이톤 ‘Hayton’으로 적는다)과 유럽 십자군 제후로서 트리폴리와 안티오크를 통치하던 보헤몬드 백작이 동맹으로서 함께 입성하였다. 키트부카는 기독교도였다. 다마스커스의 무슬림들은 거리를 행진하는 십자가에 머리를 숙여야 했으며 모스크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도들을 위한 교회로 탈바꿈하였다.

도망치던 알레포의 술탄 나시르를 추격하여 원정군은 남쪽으로 가자까지 내려갔다. 가자는 이집트와의 국경에 인접한 도시다. 여기서 훌레구는 이집트를 다스리던 맘룩 왕조의 술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너는 우리가 광대한 제국을 어떻게 정복했는지 또 이 땅을 더럽히고 있는 혼란들을 어떻게 제거하였는지 들었을 것이다. 너는 도망자이며 우리는 추격자이다. 네가 어디로 날아갈 수 있겠느냐? 어떤 길로 우리를 피해 달아날 수 있겠느냐? 우리의 말은 빠르고 우리의 화살은 예리하며 우리 검은 벼락같고 우리 마음은 산과 같으며 우리 병사들은 모래처럼 많다. 요새가 너를 지키지 못할 것이며 무기들도 우리를 멈추게 하지 못할 것이다. 하늘에 올리는 너의 기도가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경고하노라. 지금 너는 우리가 진군하려는 유일한 적이다.”

그런데 이 서한 발송 후 예기치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뭉케 칸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몽골을 지키고 있던 막내 동생 아릭부케가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중국 원정 중이던 쿠빌라이와 내전이 벌어졌다. 훌레구는 내전의 여파가 자신에게로도 튈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아제르바이잔으로 퇴각을 결정하였다. 그곳에서 세력을 정비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시리아에는 키트부카의 지휘 하에 소수의 병력을 남겨두었다.

당사 이집트는 맘룩 왕조의 술탄 쿠투즈가 지배하고 있었다. 맘룩은 아랍어로 노예를 말하는데 맘룩 왕조는 킵차크 투르크 족 출신 노예들이 세운 왕조이다. 쿠투즈는 훌레구가 시리아에서 퇴각했다는 사실을 알고 시리아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키트부카가 지휘하는 몽골군과의 싸움은 126093일 갈릴리 지방의 아인 잘루트라는 곳에서 벌어졌다. 예수의 고향 나사렛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은 대패하고 키트부카도 전사하였다. 아인 잘루트 전투는 세계사에서 중요한 한 이정표가 되는데 몽골의 이집트 원정은 물론이고 서방으로의 진출이 이로써 완전히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군대는 다마스커스, 알레포 등을 손쉽게 회복하였다. 그러나 바그다드를 수복할 생각은 없었다. 이라크 지역은 아직 몽골이 확실히 장악하고 있어 수복이 쉽지 않았다. 아인 잘루트 전투 직후 쿠투즈를 살해하고 스스로 술탄의 자리에 오른 또 다른 맘룩 출신의 바이바르스 술탄은 압바스 왕조의 친척 한 명을 이집트로 데려와서 허수아비 칼리프로 앉혀놓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시리아를 빼앗긴 훌레구도 시리아 회복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아릭부케 쪽의 움직임도 신경 쓰였지만 그보다는 킵차크 한국의 베르케의 움직임이 위협적이었다. 당시 훌레구의 일 한국과 베르케의 킵차크 한국 사이에는 국경이 명확히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영토분쟁이 일어나고 결국 이 때문에 베르케가 전사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베르케는 이집트 술탄 바이바르스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비잔틴 제국이 양국 간에 다리를 놓아 사절들은 육로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해로로 왕래할 수 있었다. 또 차가타이 한국도 아릭부케 측이 지배하고 있어 일 한국은 북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의 세 나라에 의해 포위되는 처지가 되었다. 1264년 내전에서 쿠빌라이가 승리하였지만 훌레구에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중국에 자리 잡은 쿠빌라이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훌레구 칸국이 십자군과 유럽인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은 이러한 전략적 상황 때문이었다.

훌레구 울루스는 일반적으로 일 한국이라 부른다. ‘일칸이라는 명칭은 대칸 밑의 칸이라는 뜻이다. (Jackson, 127) 훌레구가 형인 쿠빌라이를 몽골 제국 전체를 관할하는 대칸으로 인정하고 자신은 그의 밑에 있는 하위의 칸이라는 뜻에서 일칸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 쿠빌라이는 자신을 밀어준 동생 훌레구의 영역을 아무다리야로부터 이집트 문전까지라고 선언하였다. 물론 시리아는 상실하였기 때문에 일 한국은 오늘날의 이라크와 이란 지역을 포함하는 영역을 다스렸다. 훌레구의 일 한국과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중국(원나라)은 우애 넘치는 형제가 각각 다스렸기 때문에 교류가 활발했던 것은 물론이다. 원나라 때 중국의 문물과 기술이 이란을 거쳐 유럽으로 쉽게 유입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정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한다.

 

참고문헌

 

라시드 앗 딘 (김호동 역), 칸의 후예들(사계절, 2005)

P. Jackson, The Mongols and The West.

J. Saunders, The History of Mongol Conque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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