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

유목민 이야기 38회 카르피니 사절

김현일 연구위원

2017.12.28 | 조회 34

유목민 이야기 38

 

카르피니 사절

 

바투가 금장한국을 통치하던 시기(1227-1256)에 교황 사절 카르피니가 몽골 제국에 파견되어 유럽에서 몽골의 수도가 있던 카라코룸까지 왕래하였다. 이탈리아인 요한 카르피니(이탈리아어로는 조반니 델 카르피네)는 교황 이노켄티우스 4세 같이 프란체스코 수도회 초기 멤버로서 교황청의 전권대사를 맡고 있던 교황의 측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황의 친서를 휴대하고 몽골의 수도로 갔는데 1245년 봄부터 1247년 가을까지로 2년이 넘게 걸린 여행이었다. 카르피니가 남겨놓은 여행기는 당시 몽골 제국의 사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정보원이 되었다. 오늘날 역사가들에게도 몽골 제국과 유럽의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1245628일 가톨릭 교회의 최고회의인 공회의가 프랑스 리옹에서 개최되기로 되어 있었다. 보통은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서 개최되지만 당시 이탈리아는 교황과 대립하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가 거의 점령하고 있어서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공회의를 열지 못하고 프랑스 리옹에 공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당시 교회는 여러 가지 난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의 타락상이나 동서교회의 분열 같은 교회 내의 문제도 있었을 뿐 아니라 황제 -- 황제는 물론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의미한다 --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한 교황국에 대한 공격과 사라센인들의 예루살렘 성지 점거 같은 정치적 문제도 있었다. 또 수년 전 헝가리와 폴란드를 침공한 몽골족 문제도 심각한 문제였다. 몽골족이 언제 다시 유럽으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초에 러시아에서 도망쳐 온 베드로라는 이름의 성직자 한 사람이 교황과 추기경들을 면담하고 몽골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몽골족은 사절을 학대하지 않고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도 덧붙였다. 이러한 말을 들은 교황은 몽골 제국에 사절을 보낼 결심을 하게 되었다.

교황 이노켄티우스 4세는 공회의가 개회하기 몇 달 전에 이미 네 개의 사절단을 파송하였는데 이는 교황이 당시 몽골족 문제를 얼마나 심각히 생각했던가를 드러내준다. 사절단은 모두 탁발수도회의 수사들로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두 개가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이고 나머지 둘은 도미니크회에 소속된 수사들이었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로는 포르투갈 출신의 로렌스와 카르피니가 선정되었는데 교황은 원래 로렌스 수사를 중동에 진출해 있는 몽골군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마음을 바꾸어 그를 몽골군 대신 당시 레반트에 진출해 있던 유럽 십자군 세력에게 파견하였다. (Jackson, 88) 그를 대신하여 몽골에 파견된 것이 도미니크회 수사들인 아르첼린과 앙드레가 각각 이끄는 사절단이었다. 이들은 모두 배편으로 레반트로 갔는데 그곳에서 아르첼린은 아르메니아로 가서 몽골 장군 바이추와 회견하였고 앙드레는 이란의 타브리즈로 가서 몽골 측과 접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요한 카르피니는 앞의 사절들보다는 한 달 정도 늦은 416일 부활절에 출발하였다. 그의 여행경로는 해상이 아니라 육상으로 바투의 사라이로 가는 것이었다. 독일, 보헤미아, 폴란드를 차례로 지나 러시아로 들어갔는데 도중에 보헤미아 왕, 실레지아 공작 등으로부터 호송원과 여행 물자를 보조받는 등 편의를 제공받았다. 러시아에서는 볼리냐 공작 바실코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 바실코는 앞에서 언급하였던 갈리시아 공작 다니엘의 동생이다. 당시 갈리시아 공작은 서방의 도움이 절실한 형편이라서 서방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 사절을 환대하였다.

카르피니는 다른 한 수사를 동반하였는데 타타르인들 즉 킵차크 한국의 영역에 들어서서는 거기서 파견한 안내인을 따라 하루에 서너 번 말을 갈아타며 동진하였다. 마침내 바투의 본영에 도착한 사절단은 바투를 알현하고 교황의 서한 -- 앞에서 말한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에게도 교황의 동일한 친서가 주어졌다 -- 을 올렸다. 라틴어로 되어 있던 교황의 편지는 바투가 읽을 수 있도록 러시아어로, 또 러시아어에서 페르시아어로, 페르시아어에서 몽골어로 차례로 번역되었다. 교황의 서한은 몽골족이 유럽을 침략하여 파괴와 약탈을 자행한 것을 나무라며 더 이상 침략을 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침략을 하였는지 또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바투는 편지를 보고서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카르피니를 대칸에게 보냈다.

그리하여 카르피니 사절은 리옹을 떠난 지 근 일년이 다 된 124648일 다시 길을 떠나야 하였다. 사라이에 도착한 지 불과 4일만이었다. 생사가 어찌될지 모르는 곳으로 눈물을 흘리며 바투의 본영을 떠났다. 두 사람의 몽골인이 안내자로 따라 붙었는데 몽골제국의 역참을 이용하여 하루에 5-7 마리의 말을 갈아타며 가는 강행군이었다. 먹을 것이라고는 수수떡과 소금, 물 정도가 제공되었다.

러시아 땅을 벗어난 사절단은 곧 코마니아를 지나야 했는데 이는 쿠만족의 땅을 말한다. 쿠만족의 땅은 매우 길게 펼쳐져 있었는데 쿠만족의 땅을 지나자 캉기타이의 땅에 들어섰다. 중국 사서에서 강거’(康居)로 지칭된 곳이 아닌가 한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캉기타이 족의 영토를 지나자 비세르민의 땅으로 들어갔는데 이곳에는 몽골족에 의해 폐허가 된 많은 도시들과 촌락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비세르민 족에 대해서는 회교도를 뜻하는 무술만을 잘못 썼다는 주장도 있으나 어떤 족속을 지칭하는 지는 불분명하다. 그 다음은 카라키타이 땅이다. 중국사서에서 서요(西遼)라고 불린 나라가 카라키타이인데 이곳은 바투의 형인 오르다의 영지였다. 그 다음은 나이만 족의 땅으로 높은 산이 있는 곳으로 6월 말이었는데도 무척 춥고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사절단은 722일 막달라 마리아 축일에 대칸의 본영에 도착하였다. 대칸은 수도인 카라코룸 근처의 초원에 막사를 치고 있었다. 사라이로부터 이곳까지 3개월 반이 걸린 여정이었다. 카르피니의 말에 따르자면 위에서 하달된 지시에 의해 굉장히 빠른 속도로 가야만 한다. 역참에는 싱싱한 말이 준비되어 있어서 식사도 그른 채 하루 종일 말을 타고 가는 강행군이었다.

사절단을 이토록 서둘러 오게 한 것은 쿠릴타이 즉 대칸의 선출과 즉위를 위한 회의가 곧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칸은 이미 내정되어 있었는데 오고타이 칸의 아들인 구육이었다. 구육의 즉위식은 815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즉위식을 위해 각국에서 축하사절들이 왔는데 그 수가 4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카르피니는 러시아의 수즈달 대공 야로슬라블은 말할 것도 없고 사라센 국가들의 술탄들, 중국과 고려의 왕족들도 보았다. (카르피니는 고려를 솔랑게스라 하였다)

그런데 몽골의 칸들은 더러 러시아인들이나 헝가리인 등 서양인을 관리로 채용했는데 이러한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대칸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적인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또 구육 칸 밑에서 일하는 기독교인들로부터 그가 기독교에 우호적이며 심지어는 기독교로 개종할 것이라는 확신에 찬 이야기도 들었다. (Beazley, 137) 물론 이는 잘못된 정보였다.

구육 칸은 교황에게 보내는 답서를 사절 편으로 보냈다. 이 서한에서 대칸은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교황의 권유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자신만이 신의 은총을 독점하는 교황의 태도를 비난하면서 해가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 모든 나라가 나에게 복종하고 있다. 만약 내가 신의 명령에 거스르는 자라면 과연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였다. (김호동, 56) 그는 또 교황에게 직접 자신의 궁정으로 찾아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복속할 것을 표시하라고 요구면서 그대가 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나의 명령을 무시한다면 나는 그대를 나의 적으로 알 것이며 그 점을 그대가 알도록 깨우쳐 줄 것이다. 만약 그대가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신은 내가 무엇을 할지 아실 것이다.”라는 위협으로 끝을 맺었다.

중앙아시아사 전문가 김호동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이 편지는 몽골 제국이 유럽 기독교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제 카르피니는 대칸을 만나고 난 후 몽골인들은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며, 유럽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 한 가지, 그들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것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김호동, 57)

카르피니 일행은 대칸의 편지를 받아들고 12461113일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추위와 눈과 싸우며 가던 길로 다시 바투의 영지로 돌아왔는데 도착하니 59일이었다. 바투는 교황과 다른 유럽의 군주들에게 대칸이 한 이야기를 잘 전해주라고 하면서 안내인을 붙여주었다. 사절단은 그로부터 한 달 후인 6월 다시 기독교도들의 도시 키예프에 도착하였다. 키예프인들은 이들이 마치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귀환을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C. Raymond Beazley (ed.) The Texts and Versions of John De Plano Carpini and William De Rubriquis (1903)

P. Jackson, The Mongols and The West (Pearson Education, 2005)

김호동,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까치,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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