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37회 킵차크 한국

김현일 연구위원

2017.12.06 | 조회 9204

유목민 이야기 37

킵차크 한국

 

 

몽골 제국에 속한 여러 한국들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한 나라, 그러므로 유럽사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던 나라가 킵차크 한국이다. 킵차크 한국은 앞서 본 칭기스칸의 장남 주치의 영토 즉 주치 울루스로부터 나왔다.

주치가 1226년 죽자 칭기스칸은 주치의 장남 오르다에게는 볼가 강에서부터 발하시 호수까지의 영역을, 차남 바투에게는 볼가 강 서쪽의 영토를 영지로 주었다. 바투의 영지는 서쪽 경계가 확정되어 있지 않아 바투가 정복하는 곳은 그 영지에 편입되도록 되어 있었다. 바투 영지의 핵심 지역에는 투르크 계통의 킵차크 인들이 살고 있었다. 물론 초원지대의 다른 유목민 연맹처럼 킵차크도 여러 부족들의 연합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러시아인들이 폴로베츠라고 부른 쿠만 족을 위시하여 그들에게 정복당한 페체네그 족, 또 오구즈 족 및 키멕 족, 카를룩 족 등 다양한 투르크계 유목민 집단들이 속해 있었다.

영어권에서는 바투의 킵차크 한국이 금장한국(金帳汗國, Golden Horde)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세 몽골 족의 역사에 정통한 러시아 역사가 게오르기 베르나드스키에 의하면 원래 킵차크 한국은 ()한국이었다고 한다. 몽골인들에게 백색은 서쪽을 상징하였기 때문에 가장 서쪽에 위치한 킵차크 한국을 백색 한국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베르나드스키, 204-206)

베르나드스키에 의하면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동양의 저자들은 킵차크 한국을 금장한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금장한국이라는 말은 킵차크 한국이 15세기에 크림 한국과 카잔 한국으로 분할된 이후 카잔 한국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황금색은 동양의 오행론에 의하면 중앙을 뜻하므로 카잔 한국은 주치 울루스에서 나온 세 한국 가운데 중앙에 위치한 나라였기 때문에 황금 오르다즉 금장한국이라고 불린 것이다.

이러한 킵차크 한국의 토대를 놓은 것은 물론 바투였다. 바투는 킵차크 유목민들은 직접 지배하였지만 루스 족 즉 러시아에 대해서는 간접지배 방식을 취했다. 루스의 왕족들이 조공과 세금과 거둬들이는 역할을 맡고 킵차크 칸은 그들의 지위와 권력을 인정해주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통치방식에서는 러시아 왕족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러시아 왕공으로서는 블라디미르 공국의 대공 야로슬라블이 1242년 처음으로 바투 진영으로 와서 충성을 맹세하고 그 지위를 승인받았다. 야로슬라블은 구육이 새로운 대칸으로 즉위할 때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까지 가서 대칸 즉위식 행사에 참여하였다. 그는 불행히도 몽골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그의 두 아들 즉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와 안드레이는 킵차크 칸 바투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사라이로 갔는데 바투는 대칸에 대한 그들의 존경의 마음을 증명하기 위해 카라코룸으로 가라고 명했다.(베르나드스키, 210) 구육 칸은 카라코룸까지 온 알렉산드르를 키예프 대공으로, 동생 안드레이는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러시아 공들의 지위는 철저히 몽골 지배자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몽골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차 없는 제재가 가해졌다. 블라디미르 대공 안드레이가 바투의 아들 사르탁에 대한 충성선서를 거부하자 사르탁은 즉각 블라디미르로 징벌군을 파견하였다. 안드레이는 참패하여 노브고로드를 거쳐 스웨덴까지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다. 몽골군은 그의 영지 수즈달을 참혹하게 약탈하였다. 사르탁은 블라디미르에 대한 안드레이의 통치권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넘겨주었다. (몇 년 뒤 알렉산드르가 새로운 대칸인 울락치에게 동생을 용서해주도록 간청하여 안드레이는 다시 수즈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알렉산드르와 안드레이 형제가 러시아의 병력징집과 세금징수에 적극 협력하였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몽골에 협력하는 것만이 러시아인들이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당시 서북쪽에는 독일 튜턴기사단과 스웨덴 세력이 러시아를 향해 세력을 확대해오고 있었다. 몽골에 반기를 들면 결국 서쪽은 독일과 스웨덴 세력에 넘어가고 동쪽은 몽골에게로 넘어가게 될 것으로 알렉산드르는 보았던 것이다. 그와는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 것이 서부 러시아의 갈리시아 대공 다니엘이다. 다니엘도 처음에는 사라이로 가서 바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으로는 몽골의 지배를 분쇄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는 교황과 폴란드, 헝가리의 지원을 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하였다. 그는 또 자신과 협정을 맺고 있던 리투아니아 대공의 지원도 기대하였다. 이러한 지원을 염두에 두고 그는 1256년 몽골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 볼리냐에 주둔하던 몽골군을 공격하여 쫓아냈지만 그것은 잠깐 동안에 불과하였다. 몽골군은 곧 볼리냐와 갈리시아를 회복하고 항복을 거부하는 몇몇 지역들을 초토화시켰다. 다니엘은 폴란드와 헝가리로 도망쳤다가 자신이 지원을 기대하던 리투아니아 인들이 오히려 볼리냐를 급습하고 자기 아들 로만 왕자를 죽이자 절망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와 몽골의 지배에 굴종하였다.

다니엘의 저항은 러시아 지배계급 일부의 반란에 속한다. 그러나 러시아 민중들의 순수한 저항도 있었는데 그것은 무거운 세금 때문이었다. 동부 러시아의 수즈달 지역에서 일어난 1262년의 반란이 그것이다. 당시 몽골은 세금체납자들을 세금징수 청부를 맡은 이슬람 상인들이 데려다가 체납의 대가로 일을 시키거나 노예로 팔아버릴 수 있도록 하였다. (베르나드스키, 233) 세금징수를 맡았던 몽골 인들과 러시아인들이 반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민중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블라디미르 대공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다. 그는 반란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반란자들을 용서하도록 칸에게 청원하기 위해 사라이로 갔다. 당시 킵차크 칸은 바투의 동생 베르케(재위 1257-1266)였다. 그는 1255년 바투가 죽고 그 뒤를 이은 바투의 두 아들인 사르탁과 울락치 사후 칸이 된 인물인데 상당한 야심가였다. 그래서 베르케가 조카들을 독살했다는 주장도 나돌았는데 진위는 알 수 없다. 좌우간 베르케에게 가서 반란을 일으킨 자신의 동족들을 용서해달라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의 간청은 성과가 있었다. 그는 수개월 간 베르케의 본영에 머물면서 베르케로부터 수즈달에 징벌군을 파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그는 귀환하는 길에 병으로 사망했는데 후일 러시아인들을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몽골의 지배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타협주의자, 나쁘게 말하면 몽골 지배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익이 아니라 러시아 인들을 위해 그러한 타협적 입장을 취했는데 러시아인들도 그 점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베르케는 최초로 이슬람으로 개종한 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 원정에서 돌아오던 길에 부하라에서 숙박하게 되었는데 그 때 부하라에 온 무슬림 카라반 상인으로부터 그들의 신조를 듣고 개종하게 되었다고 한다. 독실한 무슬림이 된 그는 사촌인 훌레구가 무슬림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를 공격하고 칼리프를 죽인 것에 대해 분노하면서 무고하게 죽은 무슬림들을 위한 복수를 다짐하였다고 한다. 킵차크 한국과 일 한국 사이에서 수년 동안 지속된 분쟁은 이러한 종교적 원인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Howarth, Vol. II, 114) 그러나 영토분쟁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 같다. 라시드 앗 딘의 책에 의하면 두 집안 간의 갈등은 영토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두 울루스 사이에 있던 카프카즈 지역이 분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베레케는 카프카즈 산맥 남부에 있는 오늘날의 그루지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이 주치 울루스에 속하는 땅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망구 대칸이 들어서면서 그 땅을 훌레구의 땅이라고 판정한 것이다. 산맥의 남부와 북부를 가르는 분기점을 카스피해 연안에 있는 데르벤드 이곳은 산맥과 바다 사이의 매우 좁은 지역으로서 고대부터 방어하기 좋은 철문’ (Iron Gates)으로 불려진 곳이다 를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전에도 킵차크 군대가 데르벤드 남쪽에서 동영을 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킵차크 땅이라는 것이 베르케의 생각이었다. 또 킵차크 한국의 입장에서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카프카즈 지역은 그 길목이니만큼 순순히 양보하기 힘들었다.

뒤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베르케는 훌레구와의 전쟁을 위해 다각적인 외교적 노력을 펼쳤다. 맘루크 왕조의 이집트, 비잔틴 제국 그리고 룸 술탄, 심지어는 헝가리 왕 벨라 4세에게도 사절을 파견하여 우호적 관계를 맺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1266년 카프카즈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투에서 베르케는 그만 전사하고 만다. 그루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근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전사와 함께 킵차크 부대는 철수하고 전쟁은 끝이 났다. 후일 그의 후손들도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차지하고 싶어 하였으나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라시드 앗 딘 (김호동 역), 칸의 후예들(사계절, 2005)

게오르기 베르나드스키 (김세웅 역), 몽골제국과 러시아(선인, 2016)

Henry Howarth, History of Mongols from the 9th Century to the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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