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27회 마자르족의 판노니아 정복

김현일 연구위원

2017.03.15 | 조회 10761

 유목민 이야기 27

 

마자르족의 판노니아 정복

894년 즉 앞서 말한 프레슬라브 회의가 있었던 다음해 불가리아의 시메온 칸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비잔틴 제국의 국경을 넘었다. 이유는 비잔틴 황제 레오 6세가 불가리아 상인들에게 부여했던 특권을 폐지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당시 비잔틴 군대는 동방문제로 동부 전선에 파견되어 있어 불가르족의 공격에 대처할 군사력이 없었다. 그래서 비잔틴 황제는 다뉴브 강 하류 너머에 살던 마자르족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불가리아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예기치 못한 마자르족의 공격으로 시메온은 군대를 돌려 불가리아로 돌아와야 하였다. 비잔틴 제국과의 강화가 이뤄지자 시메온 칸은 마자르족에 대한 복수를 단행하였다. 그는 불가르족처럼 아시아 유목민전사들인 마자르족과 싸우는 것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해서였는지 비잔틴 황제처럼 제3의 족속을 마자르족에 대한 공격에 끌어들였다. 마자르족의 동쪽에 살던 페체네그족이다. 불가리아 군대와 페체네그족의 양면공격으로 참패한 마자르족은 자신들이 살던 다뉴브 하류 지역에서 쫓겨나 서쪽으로 이주를 감행해야 하였다. 895년에 있었던 마자르족의 판노니아 정복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헝가리인들로도 불리는 마자르족은 어족 분류상으로는 우그르어(Ugric)족에 속한다. 우그르어는 핀란드인들이 사용하는 핀어와 함께 우랄어족에 속하는 언어이다. 우그르어에서 나온 오늘날의 헝가리어는 유럽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언어이다. 그래서 마자르족의 헝가리를 언어학상의 고립된 섬이라고 부른다. 마자르족은 우랄어라는 명칭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원래는 우랄 산맥 동쪽에서 살던 수렵민족이었다. 이들은 차츰 유목민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여 유목민화 되어갔다.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은 투르크 유목민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목축과 관련된 헝가리어 단어들이 투르크어로부터 왔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나타스, 321) 마자르인들은 우랄 산록의 삼림지대로부터 남하하여 카프카즈 산맥 북쪽의 초원지대로 이동하였다. 당시 이 지역은 서투르크계의 카자르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기마전사로서 마자르인들은 카자르 제국의 북쪽 국경을 지키는 번병의 역할을 하였다.

판노니아 정복 이전 마자르족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비잔틴 제국의 유명한 학자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가 쓴 제국통치(De administrando imperio)에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10세기 중반에 씌어진 이 책은 황제가 그의 아들이 황제가 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제국 주변의 다양한 족속들과 어떠한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기술한 책이다. 페체네그, 카자르, 마자르 족 등 다양한 종족들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어 일급 사료의 가치를 지닌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마자르족에 대해 마자르헝가리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투르크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콘스탄티노스 황제만 그렇게 쓴 것이 아니고 당시 비잔틴 제국 사람들이 모두 마자르족을 투르크족이라 불렀는데 이는 마자르족이 투르크족이 세운 카자르 제국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콘스탄티노스 황제에 의하면 마자르족은 페체네그 족의 공격으로 살던 곳에서 쫓겨났는데 두 쪽으로 갈라져 한쪽은 카프카즈 산맥을 넘어 페르시아쪽으로 이동하였고 다른 한쪽은 서쪽으로 도망쳐 에텔쿠즈지역에 정착하였다. 동쪽으로 간 사람들을 제국통치에서는 그리스어로 사바르토이 아스팔로이라고 불렀는데 마자르족이라기 보다는 투르크 계통의 사비르족이었던 것 같다. 에텔쿠즈는 그 책에 의하면 에텔과 쿠즈라는 이름의 두 강에서 온 것인데 오늘날의 드네프르 강 서쪽의 흑해 북안 지역에 해당한다.

당시 마자르족은 일곱 개의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을 모두 통할하는 왕은 없었으며 부족마다 전쟁지휘관에 해당하는 사람이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황제는 이러한 전쟁지휘관을 보이보데’(voivode)라 부르고 있는데 이 칭호는 슬라브족들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말에서 온 것이다. 안드라스 로마타스 교수 같은 초기 헝가리사 전문가는 일곱 부족을 의미하는 헤트마자르라는 말은 마자르 부족연합의 명칭일 뿐으로 반드시 당시 마자르 연합이 일곱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로마타스, 340) 더욱이 정복원정 당시 카자르 제국에서 떨어져 나온 카바르족이 마자르 연합에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여러 부족들로 이루어진 기마전사 집단이 오늘날의 헝가리와 세르비아 일대를 정복하고 그곳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마자르인들은 카르파티아 분지 정복 이전에 이미 그곳을 잘 알고 있었다. 860년대에 프랑크 인들과 대립하고 있던 모라비아 대공이 마자르족을 지원군으로 불러들여 마자르족이 비엔나 근처까지 진출하여 싸운 적이 있었다. 마자르족의 원정이 시작된 894년에도 모라비아 대공은 프랑크-불가리아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마자르족을 불러들였다. 이러한 원정경험을 통해 마자르족은 당시 카르파티아 분지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의 복잡한 관계와 그곳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여러 세력들 간의 다툼을 이용하여 그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하였다.

마자르족의 헝가리 원정은 다뉴브 강을 따라서 서진하는 루트를 취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카르파티아 산맥의 고개를 넘어가는 루트를 취했다. 베레크 고개가 그것으로서 오늘날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국경이 만나는 곳이다.

마자르족의 원정은 902년까지 진행되었다. 판노니아 정복 이후 판노니아 평원에 인접한 모라비아 공국을 공격하여 마침내 그곳까지 정복하였다. (906) 이후 마자르족의 원정은 정복이 아니라 약탈을 목표로 하였다. 서쪽의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심지어는 프랑스까지 약탈원정의 목표가 되었다. 저명한 중세사가인 마르크 블로크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이 지역들에서 작성된 연대기에는 거의 매년 빠짐없이 헝가리인들의 약탈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마르크 블로크, 1p.34) 924년에는 남불의 도시 님을 공격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에서 알프스를 넘기도 하였다. 또 시메온 칸이 죽어 불가리아가 약화되자 (927) 비잔틴 제국의 트라키아 지방까지 멀리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정복 시기에 마자르인들에게는 아직 국가라고 할 만한 조직은 없었다. 물론 마자르 부족연합 전체를 대변하는 사람은 있었다. 아마 다른 부족보다 더 우월한 부족이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하면 최초의 마자르족 우두머리의 첫 번째 인물은 아르파드(Árpád)였다. 헝가리인들이 시조처럼 여기는 사람인데 이 아르파드 가문이 전체 연맹의 지도자 자리를 세습하였다. 아르파드 후손들로부터 자연스럽게 헝가리의 왕권이 형성되어 갔다. 드디어 서기 1000년 아르파드의 후손 바지크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로마 교황으로부터 왕이라는 칭호와 왕관을 받았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인데 헝가리어로는 이스트반’ (István)이라고 한다. 이스트반 왕은 죽은 후에는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추존되었다. 그의 축일인 820일은 헝가리의 건국기념일이 되었을 정도로 이스트반 왕은 헝가리인들에게 인기 있는 왕이다.

독자들은 여기쯤 와서는 궁금할 것이다. 마자르족이 세운 나라 헝가리라는 국명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라고. 일부 사람들은 헝가리를 그곳에 본영을 두었던 훈족과 연관시켜 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이는 요즘에만 그런 것은 아니고 중세 때부터 그렇게 믿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마자르인들 사이에서 자신들을 훈족의 후예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틸라 이야기는 동유럽의 유목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원의 지배집단들에서는 자신들이 아틸라의 후예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아틸라가 지배하던 곳을 자신들이 다시 정복하여 지배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문가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헝가리 초기 역사 전문가인 로나타스 교수의 말에 따르면 당시 슬라브어 문헌에는 마자르족을 오노구르혹은 라는 발음이 생략된 온구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은 투르크어로 10을 뜻하고 오구르’(혹은 오구즈’)는 부족이름이다. 즉 오노구르는 10개의 오구르 부족이 연합한 투르크 부족연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7세기경 슬라브인들은 이 투르크 유목민과 비슷한 생활을 하던 흑해 북부의 족속들에게도 오노구르혹은 온구르라는 명칭을 붙였다. 심지어는 불가르족에 대해서도 그 명칭을 썼다고 한다. 슬라브인들이 쓰던 유목인들에 대한 이 포괄적인 명칭은 서유럽에도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마자르인들이 서유럽에서 웅가리가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마자르인들의 정복이 시작되기 전인 860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드비히 왕이 오스트리아의 한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한 문서에는 웅가리인들의 변경’ (uungariorum marcha)이라고 마자르인들을 웅가리라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서유럽의 기록들에서는 차츰 웅가리훙가리가 되어 갔다. 로마타스 교수에 의하면 당시 프랑스어에서는 ‘h’가 음가를 상실하여 묵음화 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문에 기록하는 사람에 따라 웅가리에 원래 ‘h’자가 있다고 생각하여 홍가리라고 ‘h’ 자를 붙여 표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마자르 왕국은 훙가리의 왕국’(Hungarorum regnum)이 된 것이다.

9세기 초 프랑크 왕국의 카를로스 대제(샤를마뉴)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자처하기 시작한 최초의 프랑크 왕인데 헝가리 땅의 아바르 제국을 정복하여 그곳을 제국의 지배 하에 편입시켰다. 그런데 후대 중세 서유럽 사료들은 샤를마뉴가 훙가리의 왕국을 정복하였다고 기록하였다. (Karlus Hungarorum regnum vastat.) 샤를마뉴 당시에는 마자르족이 그곳에 살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는 엄밀히 말해서 시대착오적인 기록이다. 헝가리인들의 왕국은 아바르인들의 왕국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9세기의 웅가리에서 그 후 훙가리‘h’ 자가 살짝 첨가된 것을 고려해본다면 이 시대착오적인 기록은 헝가리라는 이름이 훈족을 뜻하는 후니보다는 오노구르에서 왔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Constantine Porphyrogenitus, tr. by R. Jenkins De Administrando imperio (Dumbarton Oaks Center for Byzantine Studies, 1967)

András Róna-Tas, Hungarians and Europe in the Early Middle Ages (CEU Press, 1999)

마르크 블로크, 봉건사회(한정숙 역, 한길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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