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증산도의 근본사상 제10회 | 제II장 보은(반반지은半飯之恩도 필보하라)

유철 연구위원

2017.12.28 | 조회 6461

증산도의 근본사상 제10

 

II 장 보은(반반지은半飯之恩도 필보하라)

 

보은이란 은혜를 갖는다는 뜻이다. 사실 이는 우리 인간의 삶에서 너무나 상식적인 사실이다. 우리는 은혜를 모르는 인간에 대해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비난한다. 그러한 사람을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은혜를 갚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잘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은혜를 입고 갚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서로 유기적 관계에 있을 때 인간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어떤 잘못보다도 은혜를 모르는 인간에 대해 큰 비난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장에서는 증산도 사상에서 은혜란 무엇이고, 그것을 갚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다양한 논의를 통해서 논증하고자 한다. 특히 원시반본의 실천이념으로서 보은이 갖는 의미를 논리적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1. 우주와 인간의 유기체적 관계

증산도 우주관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는 만물이 상호 대립적 존재관계로 성립하는 개체 독립적 우주가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 각자가 유기적 관계 속에서 유기적 작용을 하는 유기체적 우주이다. 이러한 유기체적 우주관은 존재하는 천지자연의 제 현상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존재해야할 이상적 신관과 인간관 및 윤리관을 설명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우주관 혹은 자연관에 기반을 두지 않은 신관이나 인간관 및 윤리관은 그 자체 공허한 담론에 그칠 뿐이며 그 진리성의 근거가 없는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선철先哲들은 인간관이나 윤리관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우주와 자연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보은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는 바로 우주와 인간과 신명의 유기적 상관성을 밝히고 있는 증산도 우주론이다. 필자는 원시반본, 해원, 상생 등 증산도 개벽사상을 대표하는 주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지금 필자가 접근하고자 하는 보은 사상 역시 단순히 인간 대 인간의 은혜 입음(被恩)이나 은혜 갚음(報恩)에 대한 한정된 담론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오히려 보은사상이야말로 우주론적 원리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하며, 이를 바탕으로 해서만 인간 삶의 근본 원리로 확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관심은 은혜를 갚는다는 다분히 윤리적 의미를 갖는 보은사상이 사실은 그 근저에 우주론적 토대를 깔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증산의 핵심사상 전반에 흐르는 몇 가지 필연적 연결고리를 밝혀내는 것이다.

첫째, 우주의 질서에서 드러나는 생명살림의 의도, 둘째, 우주의 질서에서 추론되는 은혜 갚음의 실천적 규범들, 셋째, 보은 개념에 내포된 인간의 궁극적 심적 상태와 후천선경의 실현 등에 관한 것이다. 결국 이는 우주론으로부터 실천적 행위규범을 추론하는 것은 객관적 자연현상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인이며, 우연적 개념으로 보이는 실천규범들은 우주 내 인간의 당위적 행위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행知行이 합일合一할 때 진정한 삶의 모습이 현실 속에서 투영되어 나타나게 된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BC399)는 앎과 실천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선은 지에서 나옴을 강조하였다. 필자는 뒤에 나오는 상생에 관한 글에서 증산도 인간론의 특성을 앎을 매개로 하는 실천임을 주장하였다. 즉 우주원리에 대한 통찰에서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증산도 실천이념의 근본적 특성이며, 따라서 보은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새로운 삶의 원리는 후천선경에서, 증산의 가르침에 대한 깨달음에서, 천지의 이치를 맑은 물속의 물고기를 보듯 통찰할 때 가능하다는 뜻이다. 결국 앎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 아니 앎이 없는 행위란 이치에 합당하더라도 그 윤리적 가치는 획득될 수 없다. 보은에 대한 증산의 사상에서 우리는 바로 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도통을 통해 천지의 이치를 깨닫는 것에서 보은은 시작된다.

이 장에서 우리는 시종일관 이러한 관점을 논증하는 자세를 취할 것이다. 그 이유는 증산의 핵심사상은 그 자체 인간의 실천을 위한 인위적, 상대적 개념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필연적 기반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는 이를 확인하면서 인간의 행위규범으로 보여지는 증산도 핵심 사상들의 법칙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2. 보은의 원리적 이해

이 절에서 다루려는 것은 은혜 입음과 은혜 갚음에 대한 원리적 이해이다. 그리고 그 은혜의 초점은 생명살림의 목적을 갖는 천지의 은혜에 관한 것이다. 원리적 이해란 법칙적 이해 혹은 근원적 이해란 의미이다. 따라서 보은의 당위성에 대한 법칙적 논증, 혹은 원리적 논증이 보은의 원리적 이해의 주제가 될 것이다.

보은이란 받은 은혜(被恩)를 되돌려 보답하는 것(報恩)’이다. 증산은 우리 공부는 물 한 그릇이라도 연고 없이 남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공부니 비록 부자 형제간이라도 헛된 의뢰를 하지 말라.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마음으로 반기어 잘 대우하면 그 사람은 모를지라도 신명神明은 알아서, 어디를 가든지 대우를 잘 받게 되느니라. 밥을 한 그릇만 먹어도 잊지 말고 반 그릇만 먹어도 잊지 말라. ‘일반지덕一飯之德을 필보必報하라는 말이 있으나 나는 반반지은半飯之恩도 필보必報하라하노라”( 2:28:1-4)고 하였다. 이 구절은 보은의 중요성과 함께 밥 반 그릇에도 보은줄이 붙어 있다는 보은의 철저성에 대해 강조한 말이다. ‘밥 반그릇의 은혜조차 반드시 갚음을 강조하는 증산의 보은사상에서 하물며 천지의 은혜, 그것도 생명의 낳음과 살림에 대한 은혜는 그 갚음의 당위성에서 볼 때 인간의 의무로 다가온다. ‘배은망덕 만사신背恩亡德萬死身은 밥 반그릇의 은혜에서부터 생명살림의 은혜까지 그 갚음의 당위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은혜 갚음의 당위성을 어떻게 논증할 것인가.

 

1) 보은의 당위성에 대한 논증

인간의 행위는 인간 의지의 드러남이다. 그리고 그 행위와 그 행위의 의지에 대해 선악의 판단을 할 수 있을 경우 우리는 그 행위를 윤리적 행위라고 한다.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는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이면서 해야 하는 행위이다. 도덕적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실제로 인간의 모든 행위가 도덕적이지는 않다. 인간은 이렇게 저렇게 행위하며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선하기도 악하기도 하다.

칸트(I. Kant, 1724-1804)는 행위의 도덕성을 행위하는 자의 의지에서 찾는다. 그러나 선한 의지를 갖는 행위는 도덕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행위의 결과가 반드시 바람직하거나, 혹은 성공적이지는 않다. 윤리적 가치는 그 행위의 결과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동기가, 그리고 그러한 동기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원칙에 합치할 때 주어진다. 아래서는 원리에 합치하는 도덕적 행위, 즉 당위적 행위에 대해 살펴보고 보은은 바로 그러한 당위적 행위임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칸트가 행위의 당위성을 도출하는 논의에 따라서 의무의 개념을 도입하고자 한다. 의무는 도덕적이기 위해 어떤 행위를 행해야할 당위성이다. 칸트는 의무에 합치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에서 말미암는 행위의 도덕적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의무가 곧 행위의 순수한 동기가 되고 또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의무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근거해야할 원리이다. 그리고 그것은 행위에 관련된 실천원리이다. 물론 칸트가 말한 도덕원리들, 즉 정언명법들은 보편적인 행위원리이다. 그러한 보편적 행위원리는 그 속에 어떤 구체적 행위의 종류를 거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형식적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칸트의 도덕철학은 법칙윤리학, 혹은 형식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형식윤리학이 도덕적 원리를 발견하는 절차에 따라 보은을 하나의 필연적 실천원리로 도출하고자 한다.

보은이 행위의 동기로서의 실천원리이면서, 동시에 실천원리로서의 보은은 단지 주관적 타당성만을 갖는 준칙이 아니라 객관적 법칙이어야한다면, 보은은 어떻게 보편적이면서 필연적인 행위의 동기가 될 수 있는가. 이 문제의 해결은 보은의 당위성을 논증하기 위해 필요한 유용한 절차이다.

은혜 입음과 은혜 갚음의 관계는 보은이라는 실천원리가 갖는 동기와 결과, 이 양자에 동시에 관련된다. 엄격히 말해서 보은은 은혜 갚음이고, 은혜를 입음에 대한 인식에서 그 은혜를 갚아야 함의 의무감이 생겨나고, 그 의무감이 동기가 되는 행위의 결과가 보은이다. 그렇다면 실천원리로서의 보은은 행위의 형식적 원리가 아니라 은혜 갚음이라는 내용을 갖는 내용적원리이다. 이는 아마도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은혜에 반드시 보답해야한다라는 원리로 정식화될 것이다. 물론 이 원리에 따른 행위는 의무감에 따른 행위이며, 따라서 그 행위의 결과가 무엇인가와는 무관하다. 즉 은혜를 갚음으로서 얻게 되는 결과와 상관없이 보은은 의무감에서 행해져야 한다. 우리는 칸트의 정언명법에 따라서 증산도 후천개벽의 행위법칙을 정식화하면 아마도 너의 행위의 준칙이 언제나 어디서나 우주의 법칙에 일치하도록 행위하라.”가 될 것이다. 이 때 이러한 행위의 법칙은 경향성을 배제한, 선천적 형식을 갖는다. 보은은 이러한 절대적인 행위원칙, 혹은 실천법칙에 따르는 보편적 행위규범이다.

엄격히 말해서 보은의 의무감이란 말은 칸트의 도덕철학적 관점에서는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의무는 그 내용을 배제한, 전적으로 행위의 형식적 동기이기 때문이다. 의무에서 말미암은 행위의 선택에서 그 의무감 이외에 어떠한 구체적 경향성이나 행위의 내용도 행위선택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은이라는 특정한 구체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그 행위가 바람직한 행위이기 위한 그 특정한 행위의 의무감이란 것은 무의미하며 불필요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이는 한편 형식적으로는 칸트의 본의에 가까우면서 한편 그 실제성에 있어서는 칸트의 진의에서는 벗어난 생각일 수 있다. 왜냐하면 행위의 경향성과 의무감은 결코 모순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아주 섬세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결국 보은이라는 행위의 특정한 경향성이 행위의 도덕적 가치를 결정하는 의무감에서 말미암은 행위와 어떻게 상호 조화될 수 있으며, 따라서 보은이 행위의 구체적이면서 도덕적인 원리일 수 있는가의 문제는 양자가 모순개념이 아님을 보여줌에서 해결 가능하다.

이는 칸트의 주장이 의무감에 따른 행위가 반드시 그 행위로 인한 행복이나 경향성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칸트의 주장은 단지 의무감에 따른 행위의 규정에서 경향성이 행위의 동기에서 배제되어야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를 통해서 순수형식 윤리학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의무감에 따른 행위는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근거하는 행위이며, 이는 어떤 경험적 경향성도 배제된 상태에서의 행위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도덕적 행위와 경향성이 상호 배제적인 모순개념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무와 일치하는 행위로서 보은에 대한 본성적 경향성이 그 자체로 도덕적 행위를 산출할 수는 없지만(왜냐하면 칸트에 있어서 도덕성은 결코 경향성에 따른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적 행위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어야 한다는 것이 칸트의 결론이다. 또한 보은을 의무감에 따른 행위로 규정할 때, 은혜 입음과 갚음에 대한 경향성이란 것은 어떤 구체적 경험의 내용에 따른 경향성이 결코 아니다. 이는 증산도 우주론에서 볼 때 보은은 가장 선천적이고 형식적인 보편원리라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이러한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것은 이 글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단지 우리는 칸트가 행위의 도덕적 동기로 받아들이는 의무의 개념을 도출하는 것을 통해서 보은이 개벽시대 인간의 의무이며, 따라서 보은은 행위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확보하는 실천원리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칸트의 의무감과 경향성의 관계는 실천이성의 영역 내에서 도덕적 행위와 관련된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문제로 삼고 있는 보은과 보은의 원리화 가능성은 그러한 도덕적 행위에 한정되는 실천개념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는 증산도의 개벽사상과 그 개벽의 정신으로서의 원시반본, 그리고 원시반본의 구체적 실천원리중의 하나인 보은에 대해 그 원리성을 검토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보은이 인간의 모든 행위를 도덕적으로 만들어주는 실천원리임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주 원리로서 후천개벽을 실현하는 최고의 실천원리임을 논증하려는 것이다.

칸트는 도덕적 행위의 원리를 주관적 원리와 객관적 원리로 구분하고 전자를 준칙, 후자를 정언명법이라고 부른다. 그 양자의 차이는 행위가 개인에게 타당한가 아니면 모든 인간존재에게 타당한가에 있다. 준칙은 개인적 행위원리이며 이는 객관적 원리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타당하다고 주장되지 않으며,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객관적 원리는 모든 사람에게 타당한 행위원칙이며 따라서 만인의 준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준칙이 개인적 경향성에 따른 원리이지만 그 경향성이 항상 개인적인 이익과 관련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칸트가 준칙을 경험적 준칙(실질적 준칙)과 선천적 준칙(형식적 준칙)으로 구별하는데서 찾을 수 있다. 전자는 경험적 감각적 욕구와 경향성에 기초한 준칙이라면 후자는 경험적 욕구에 의존하지 않는, 따라서 그 목적의 이불리에 관계하지 않는 준칙이다. 준칙이 객관적이 된다는 것은 형식적 준칙이 된다는 것이고, 그 때 행위의 경향성은 보편적 경향성이 되며 우리는 이를 도덕적 행위와 관련지어 의무감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보은은 바로 이러한 행위이다. 즉 선천적이고 따라서 그 목적에 관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든 인간의 당위적 행위이며, 그러므로 의무이다. 보은은 준칙이면서 개인적 이익에 관계하지 않고, 또 그 준칙은 보편적 행위의 타당성으로, 즉 모든 인간에게 타당한 보편적 경향성을 갖는 행위이다. 보은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준칙에서 출발하지만 이는 나 자신에게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타당한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의도하는 행위이다. 즉 보은에 따른 행위는 나에게만 타당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도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네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형식적 정언명법이 칸트적 도덕법칙이라면, 보은은 천지와 인간의 우주론적 관계에서 드러나는 제일의 도덕법칙이다. 아니 이는 존재법칙이다. 보은이 원리에 합치하는 행위임은 보은의 궁극적 대상과 방법에 대한 논의에서 밝혀진다. 천지보은에서 보은은 천지의 이치에 따르는 행위이다.

보은이 합치하는 원리는 우주의 원리이다. 그리고 가장 보편적인 존재원리인 우주의 원리에 벗어난 어떤 행위도 도덕적일 수 없다. 그것은 천지가 인간을 낳은 목적이며, 후천개벽시대 인간의 의무이다. 이러한 의무감은 곧 칸트에 의하면 도덕성의 존재근거이다. 보은이 모든 경향성을 배제한 순수 형식적 도덕원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은은 곧 은혜에 대한 갚음이라는 구체적 영역을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무와 도덕성, 그리고 도덕원리의 상호 연관적 성립에서 그것들과 경향성이 완전히 모순적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이 칸트의 결론이고 보면 우리는 경향성을 포함한, 그러므로 구체적 영역 내에서의 원리이지만 그 도덕성과 법칙성을 동시에 찾아볼 수 있다.

보은은 증산도의 최고 목적, 즉 우주와 인간의 최고 목적인 후천개벽의 실천원리 중의 하나이다. 여기서 후천개벽은 그 모든 가치의 절대적 기준이란 점에서 최고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최고선을 지향하는 실천원리인 보은은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인간은 후천개벽의 때인 우주의 가을에 어느 누구도 보은의 당위성과 의무감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보은이 갖는 행위의 경향성은 물론 보은이 최고의 도덕적 원리가 될 근거를 가로막는 것은 아니다. 즉 칸트에 있어서 구체적 내용을 지시하지 않는 최고선에 대한 지향으로서의 도덕법칙과 달리 증산도의 보은 사상은 후천개벽이라는 최고선을 지향하는 최고의 실천원리이다.

동시에 보은은 필연적으로 경향성을 내포하는 만큼 그 속에 구체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보은이 그 행위를 통해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행위를 하기 위해 그 행위의 동기인 은혜 입음(피은)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한다는 의미이다. 즉 보은의 경향성은 그것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혹은 그 목적이 이익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즉 은혜에 대한 인식은 은혜에 대한 갚음을 당위적으로 지시하기 때문에 경향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보은이 목적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목적이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보은의 행위동기는 바로 의무감, 즉 은혜의 인식에서 나오는 의무감, 혹은 우주원리에 따르는 의무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보은이 갖는 당위성과 의무를 은혜의 보편성과 필연성의 측면에서 접근해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보은은 은혜 입음의 보편성, 즉 천지의 모든 생명체는 존재자체가 은혜의 줌과 갚음의 관계성 속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에서 은혜에 대한 갚음의 동기는 우주원리에 따라 필연적이고 당위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그것이 곧 삶의 한 방식이며 피할 수 없는 생명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 내용에서 이 문제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보은의 우주론적 필연성에 대해 다루어 볼 것이다. 이는 은혜의 주고받음, 즉 은혜의 수수법칙授受法則은 우주 내 모든 생명존재들의 최상의 삶의 법칙, 행위방식이며 이를 밝힘으로써 우리는 보은이 갖는 그 필연적 경향성 혹은 동기를 인간의 주관적 실천원리의 한계를 넘어서 우주론적 당위성으로 귀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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