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동서 문명의 만남: 독일의 중국학자 리하르트 빌헬름

이내금

2013.07.12 | 조회 14303

동서 문명의 만남:

독일의 중국학자 리하르트 빌헬름

 

 

이내금 (번역부)

 

서양인으로는 최초로 중국어 읽고 쓰기를 익히고, 중국 고전에 심도 깊게 접근했으며 여러 권의 저서를 한문으로 펴내기도 했던 마테오 리치 Matteo Ricci (중국명 利瑪竇: 1552-1610)는 인류문화사적 입장에서 최초의 세계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마테오 리치 이후로도 수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동양으로 진출하였고, 중국을 서양에 알리면서 중국학의 흐름을 이어갔지만 동서양의 문화적·이념적 장벽을 허물면서 진정한 의미의 하나가 되는 세계를 위해 애쓴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중의 한 사람으로 마테오 리치보다 3백년 후에 기독교 선교사로 중국 땅을 밟았고, 평생을 동서 문명의 만남을 위해 노력한 독일인 리하르트 빌헬름 Richard Wilhelm (중국명 衛禮賢: 1873-1930)을 들 수 있다.

 

 

1. 시대적 배경

 

서양의 중국학, 혹은 한학 Sinologie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국의 기독교 포교활동을 위해 중국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혀나갔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기독교 성서를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중국 기행문을 통해 서양세계에 중국의 모습을 전하면서 동서양 문화 교류에 이바지하였다.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중국 철학이 유럽 문화, 특히 18세기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 사상에 미친 영향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 교류는 사회의 지적 엘리트층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고, 일반 대중에게 비쳐진 중국의 상은 여전히 문화적 장벽처럼 남아있어, 중국은 이국적 정취를 야기하는 심미적 대상이거나, 아니면 제국주의와 맥을 같이하는 문화적 정복의 대상으로 극단화되기도 하였다. 1814년 파리 대학에 유럽 최초로 중국학과가 개설되었고, 유럽 중국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레뮈자 교수 Jean Pierre Abèl Rémusat (1788-1832)의 활동으로 중국과 중국어는 인문학적 연구대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독일의 중국학의 출발은 이보다 훨씬 늦어서, 1887년 중국학 강좌가 개설되었고, 1889년 라이프치히 대학에 독일 최초로 중국학과가 개설되었다.

 

당시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텐진조약 (1858)과 베이징조약 (1860)을 체결하게 되었고, 그 결과 유럽을 비롯한 서양 제국주의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각국의 선교회들은 선교사들을 중국에 파견하여 전도, 학교설립, 병원설립, 출판사업 등의 사역을 통해 기독교 전파에 주력하였다. 제국주의 흐름에 뒤늦게 편승한 독일 내에서도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이와 발맞추어 많은 선교사들이 특권을 부여받고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는데, 마침 1897년 산둥 지방에서 자국의 선교사 두 명이 중국인에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동아시아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던 독일은 이를 빌미로 자오저우만을 점령하였고, 1898년 청나라와 조약을 체결하여 자오저우만의 조차권을 얻어 칭다오 조계지를 설치하였다. 바로 이곳 칭다오에서 리하르트 빌헬름은 1899년부터 1920년까지 20년간 동아시아 선교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2. 리하르트 빌헬름 생애

 

1873510일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유리 화공 畵工의 아들로 태어난 빌헬름은 1882년 아버지를 여읜 후 어머니와 할머니의 보호 아래 성장하였다. 1891년부터 튀빙엔 대학에서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였고, 1895년 슈투트가르트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897년부터 볼 Boll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부목사 직을 수행하였다. 그곳에서 빌헬름은 훗날 그의 장인이 될 블룸하르트 목사 Christoph Friedrich Blumhardt (1842-1919)를 만나게 되었다. 블룸하르트는 독일 경건주의를 신봉하는 목사로, 훗날 사회주의 개혁가로 변신하였는데, 빌헬름의 삶과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빌헬름은 1900년 상해에서 살로메 블룸하르트와 결혼하였다.

 


빌헬름은 칭다오에서 선교사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독일-중국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펼쳤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청나라 황실에서 서훈을 받기도 하였다. 독일 조계지가 된 1897년부터 1918년 일본에 점령당하기 전까지 독일 선교사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던 칭다오는 다른 조계지와 마찬가지로 선교사업의 명암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빌헬름은 기독교 선교사로서 1900년 중국 산둥 일대에서 일어난 반기독교적 민족운동이었던 의화단 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겪으면서 당시 제국주의적, 문화적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선교사들의 부도덕함과 선교활동의 허위적 실상의 문제점을 절감하였다. 그는 훗날 저서 『중국의 혼』에서 중국의 선교사는 문화민족의 일원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중국을 대해서는 안 될 것이며, 그가 취해야 할 관점은 인간 대 인간이어야만 한다.” 고 주장하였으며, 그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던 융 C. G. Jung에게 자신이 선교사로서 한 사람의 중국인도 개종시키지 않았던 것은 대단한 위안이 된다고 토로하기도 하였다.

 

선교 사업의 유럽 중심적 사고에 소원함을 느꼈던 빌헬름은 그가 설립한 학교를 통해 자연스럽게 라오나이쉬안 (勞乃宣 18431921)과 같은 중국의 학자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이들을 통해 중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나갔다. 빌헬름의 경우 본격적인 중국어 학습은 중국에 와서야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어느 유럽인들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중국어와 문화를 익혀나가면서 중국 고전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는 처음부터 문화적 이질감 없이, 오히려 깊은 애정과 감탄의 대상이었던 중국문화를 서양세계에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하였으며, 그의 중국 고전 번역의 목적 또한 이곳에 있었다.

 

러일전쟁 (1904-1905)의 여파는 칭다오에서도 어김없어, 빌헬름은 어려운 상황에서 선교활동을 이끌어갔다. 빌헬름은 1907년 부인과 네 자녀와 함께 독일로 첫 휴가를 떠나 볼의 처가에 머물렀다. 1908년 칭다오로 돌아왔으며, 1911년 열대성 질병에 걸려 요양차 귀국하였으나, 다음 해 다시 임지로 돌아왔다. 1 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도 빌헬름은 가족과 떨어져 칭다오의 교민들을 위해 교육과 선교활동을 계속하였고, 1920년 여름, 20년간의 선교활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2년 후인 1922, 빌헬름은 다시 홀로 중국으로 떠나 1924년까지 베이징 주재 독일 공관의 학술고문으로 재직하면서, 베이징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1924년 빌헬름은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명예교수로 임명되어 신설된 중국역사 및 철학 강좌를 전담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빌헬름은 중국과 독일 문화교류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중국 문화연구소 설립을 추진하였고, 1927년에는 동 대학의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이후 각계 저명인사들의 관심과 후원에 힘입어 본격적인 학술활동을 펼쳐나갔고, 중국-독일 연감과 함께 학술지 『Sinica』를 발간하여 독일 내 중국학을 정립해 나갔다. 빌헬름은 『태을금화종지』의 독일어 번역서인 『Das Geheimnis der Goldenen Blüte』에 서문을 써주었던 C. G. 융을 비롯하여 알베르트 슈바이처, 헤르만 헤세, 타고르 등과 같은 당대 저명한 학자와 철학자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동서양 문화의 정신적 매개자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빌헬름은 이전에 앓았던 열대성 질병이 재발하여 병석에 눕게 되었으나, 임종 직전까지 1910년부터 추진해왔던 10권으로 계획된 『중국 종교 철학사』의 독일어 번역과 출판에 매진하였다. 193031일 튀빙엔에서 사망하였고, 33일 그의 첫 교구였던 볼의 작은 묘지에 안장되었다. 1933년 독일 보쿰 대학 중국어문학과 부속기관으로 설립된 번역원은 빌헬름의 이름을 따서 Richard-Wilhelm- Übersetzungszentrum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번역을 통해 중국문화를 독일에 전달한 빌헬름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3. 빌헬름의 고전 번역

 

1905년부터 『논어』를 비롯하여 『주역』, 『도덕경』, 『장자』, 『맹자』 등과 같은 주요 고전들이 빌헬름에 의해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번역서들은 1910년부터 예나 Jena의 디데리히스 Diederichs 출판사에서 출판되기 시작하면서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주역』과 『도덕경』은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3.1 『주역』 I Ging. Das Buch der Wandlungen

서양의 『주역』번역의 역사는 18 세기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최초의 서양어 번역본은 빌헬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빌헬름의 중국 고전 번역서 중에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주역』의 번역과 주해에는 중국 언어와 철학에 대한 그의 탁월한 이해가 바탕이 되고 있지만, 그 사상적 배경은 중국어학자 라오나이쉬안에게서 유래한다. 라오나이쉬안은 10 년에 걸친 그들의 필생의 작업으로 번역이 완성되고, 출간을 앞두고 있던 무렵에 세상을 하직하였다.

 

빌헬름은 중국의 전통적인 가치를 복구시키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당시 개화와 보수의 갈등 속에서 중국의 젊은 층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던 반면 빌헬름은 오히려 찬란한 문명을 보유한 국가로서 중국의 위대성을 기리고자 하였으며, 이를 고전에 담겨있는 전통적 가치 속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현재 독일 중국어문학계가 빌헬름의 번역작업에서 비판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의 사상적 바탕 - 기독교적인 경건성과 중국의 유교적 전통가치 - 에 근거한 가치 편향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 시도가 이어졌는데, 한 예로 스위스의 심층심리학 연구소인 에라노스 재단 Eranos-Stiftung은 가능한 한 어떤 방향으로의 해석도 시도하지 않은 채 중국어 원전에 최대한 근접하면서 빌헬름의 번역이 비껴나간 예언서적 텍스트로서의 특성을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하르트의 『주역』번역본 (1924)은 레그 James Legge (1815-1897)의 영역본 (1882)과 함께 표준 정본으로서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 빌헬름의 번역본은 독일의 디데리히스 출판사의 고전 시리즈로 꾸준히 발간되고 있으며, 그의 아들인 헬무트 빌헬름 Hellmut Wilhelm의 『주역』 개설서인 『Sinn des I Ging』과 함께 일반대중을 위한 『주역』 입문서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영어로 번역되기도 한 빌헬름의 번역본은 우리나라에서도 1996년에 소나무에서 『주역강의』 (진영준 역)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3.2. 『도덕경』 Laotse. Tao te king. Das Buch der Alten vom Sinn und Leben

최초로 서양에『도덕경』을 소개한 사람들은 17세기 중엽에 중국으로 건너간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청나라 황실과 접촉하면서 중국의 정신세계와 만나게 되었고, 공자를 비롯한 중국 철학자들을 유럽에 소개하면서 미약하나마 문화교류를 담당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에게도 『도덕경』의 내용은 쉽사리 이해될 수 없었으나, 이들은 『도덕경』을 기독교의 삼위격과 신의 人性과의 연관성 속에서 바라보고자 하였고, ‘를 창조주 신의 최고이성’ ratio으로 풀이하였다. 이들이 작성한 라틴어 번역 필사본이 1788년 런던 왕립협회로 보내짐으로써 『도덕경』이 서양 문화권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도덕경』을 최초로 인문학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석한 사람은 파리 대 교수인 레뮈자였다. 그는 논문 (1823)과 강연 등을 통해 노자를 신비주의자이자, 도덕적 범절을 가르치는 철학자로 소개하였다. 1842년 그의 제자인 쥘리앙 Stanislas Julien (1797?-1873) 에 의해 최초의 불어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쥘리앙의 번역은 한동안 서양 『도덕경』 번역의 교과서처럼 여겨졌고, 영국에서 개신교 선교사였던 차머즈 John Chalmers에 의해 이루어진 최초의 영어 번역 (1868)도 그의 해석을 따르고 있다. 1891년 옥스퍼드 대학의 중국어 교수였던 레그에 의한 영어 번역이 뒤따른다.

 

독일에서는 1870년 슈트라우스 Victor von Strauss (1809-1899)에 의해 처음으로 원전 번역이 시도되었고, 이후 빌헬름의 번역본이 1911년에 나오기까지 여덟 개 정도의 번역서가 다양한 형태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서는 텍스트 자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밑바탕이 되지 않아 철학적 성찰에서 비껴나갔으며, 번역자의 정서에 맞게 번안된 경우도 있었다.

 

빌헬름은 1911년 초판 번역본 서문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중국어 원전 번역을 통해 비록 분량은 작지만 중국 사상에 커다란 영향력을 갖는 이 책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면서, 기존의 외국어 번역이나 주해는 부차적인 자료로 참고하고, 중국 문헌을 바탕으로 해석의 근거로 삼겠노라고 하였다. 중국어 원전에 충실하고자 했던 빌헬름의 이 번역은 독일 중국학계에서는 개신교 선교사로서 『도덕경』의 의미를 기독교적 의 개념과 부당하게 연관시켜서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빌헬름의 『도덕경』은 번역서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디데리히스 출판사는 1957년 개정판에서부터 변화된 언어감각과 사고체계에 걸맞게 다듬어진 수정 번역본을 출판하고 있다.

 

 

 

4. 빌헬름의 대표적 저서 및 번역서

 

Kungfutse: Gespräche. Lun Yü (논어). Jena 1910; München 1996.

Laotse. Tao te king. Das Buch der Alten vom Sinn und Leben (도덕경). Jena 1911; München 1998.

Liä Dsi. Das wahre Buch vom quellenden Urgrund. (열자 충허진경). Jena 1911; München 1996.

Dschuang Dsi. Das wahre Buch vom südlichen Blütenland. (장자 남화진경). Jena 1912; München 2002.

Mong Dsi. Die Lehrgespräche des Meisters Meng K’o (맹자). Jena 1916; München 1994.

Chinesische Volksmärchen (중국 민담). Jena 1921.

I Ging. Das Buch der Wandlungen (주역). Jena 1924; München 2002.

Die Seele Chinas (중국의 혼). Berlin 1926.

Ostasien. Werden und Wandel des chinesischen Kulturkreises (동아시아. 문화의 생성과 변천). Potsdam u. Zürich 1927.

Frühling und Herbst des Lü Bu We (여씨춘추). Jena 1928; München 1979.

Das Geheimnis der Goldenen Blüte. Ein chinesisches Lebensbuch. (태을금화종지) Zürich 1929; München 2000.

Li Gi. Das Buch der Riten, Sitten und Bräuche (예기). Jena 1930; München 1997.

Kungfutse: Schulgespräche. Gia Yü (공자가어). München 1981; München 1997.

  




글: 이내금(2006.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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