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17회 아틸라의 이탈리아 원정

김현일 연구위원

2016.07.21 | 조회 11051

■유목민 이야기 17회

 

아틸라의 이탈리아 원정

 

 

갈리아 원정에 이은 이탈리아 원정에 대해 일부 역사가들은 마치 아틸라가 갈리아로부터 퇴각하면서 이탈리아를 침공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문제를 깊이 연구한 멘헨-헬펜에 의하면 이탈리아 침공은 갈리아 원정이 있었던 다음 해인 452년 초여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135) 판노니아로부터 이탈리아로 가는 길은 오늘날의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땅을 지난다. 줄리안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는 코스인데 줄리안 알프스는 원 알프스 산맥에서 뻗어나간 산맥으로 그렇게 높지는 않다. 이 산맥에는 로마의 방어요새들이 있었으나 적군의 진군을 저지할 수 있을 정도의 요새는 아니었다. 서로마 제국의 방어 체제는 줄리안 알프스를 중시하지 않아 많은 라인 강이나 다뉴브 강 국경처럼 많은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틸라 이전의 여러 게르만족 침략 때에도 침략군은 별다른 저항을 만나지 않고 북부 이탈리아로 들어올 수 있었다. (136)

아틸라 군은 북부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아퀼레이아를 공격하였다. 이 도시는 아드리아 해의 북안에 위치한 곳으로 줄리안 알프스를 내려서면 바로 만나게 되는 도시였다. 성은 튼튼한 성벽 때문에 석 달 동안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함락되지 않았다. 병사들 사이에서 불평이 일어났다. 포위공격을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진지를 걷어서 다른 곳으로 가야할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성벽 주위를 돌던 아틸라는 이상하게도 황새가 새끼들을 데리고 아퀼레이아 성안에 있는 둥지를 떠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병사들을 모아놓고 황새가 앞으로 닥칠 위험을 알고 급히 피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공격에 박차를 가하자고 설득하였다. 요르다네스에 의하면 아틸라의 설득이 주효하여 병사들은 공성기구를 만들고 갖가지 투사무기들을 동원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철저한 약탈이 뒤따랐던 것은 물론이다.

아틸라 군은 그 남쪽의 여러 도시들을 공격하였지만 서로마 제국의 수도 라벤나는 그냥 지나쳤다. 아퀼레이아 이상으로 튼튼한 성벽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함락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또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로마 시로도 진군하지 않았다. 대신 아틸라는 포강 연안의 파도바(파타비움), 만토바(만투아), 베로나, 파비아(티치눔), 밀라노(메디오라눔) 등을 차례로 공격하였다. 한동안 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밀라노를 점령한 후에는 그곳에 오래 체류하지 않고 곧 동쪽으로 물러갔다. 아틸라가 당시 황제가 머물던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포강 유역 즉 북이탈리아에만 머물다가 퇴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요르다네스는 아틸라 자신은 로마로 곧바로 진격하기를 원했지만 그의 부하들이 40 여년 전 서고트족의 왕 알라릭이 로마를 약탈한 후 얼마 있지 않아 죽어버렸다는 것을 지적하며 로마를 공격하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그래서 아틸라는 매우 주저하며 공격여부를 고심하고 있는데 로마주교 레오가 서로마의 고위 인사를 두 명 데리고 몸소 사절로 와서 아틸라에게 로마 공격을 만류하였다. 요르다네스는 그 접견장소를 사람들이 빈번히 이용하는 민치오 강의 여울이 있는 베네치아 지방의 안불레이움 구역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휴양지로 유명한 가르다 호숫가 남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주교 레오는 로마 뿐 아니라 서로마 제국 전체에서 로마 주교의 우위를 주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실질적으로 교황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첫 번째 인물이다. 그는 당시 서로마 당국이 보호해주지 못하던 로마 시의 실질적 시장 노릇도 하였다. 하느님의 권세가 작용하였는지 이 레오 교황의 설득을 받아들인 아틸라는 호노리아 공주를 그녀의 상속분에 해당하는 재산과 함께 자신에게 보낼 것을 요구하고는 이탈리아로부터 퇴각하여 다뉴브 연안에 있는 그 본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레오 교황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장한 이 설명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레오 교황은 기껏해야 훈족에게 사로잡힌 포로들의 석방을 놓고 협상을 벌였던 것 같다. 아마 일부 고위 인사들은 높은 몸값을 치르고 풀려났을 것이고 몸값을 지불할 능력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훈족에게 끌려갔을 것이다. 몇 년 뒤 훈 제국이 무너진 후 죽었다고 생각되었던 사람들이 이탈리아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남편이 훈족에게 끌려가 소식이 없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여 다른 남자에게 재가한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전남편이 돌아왔을 때 그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퀼레이아 주교가 문의하자 교황은 여자들을 전남편에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교황의 설득에 의해 훈족이 돌아간 것 같지는 않다. 그들에게 교황은 로마의 최고 무당일 뿐이다.

아틸라 군의 퇴각에 대한 좀 더 설득력 있는 기록은 갈레키아 지방(현재는 포르투갈에 있는 지방이다)의 주교 휘다티우스의 연대기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보낸 지원군과 더불어 하늘이 내린 재앙이 아틸라로 하여금 이탈리아를 떠나도록 하였다. 그것은 기근과 전염병이었다.(Burgess, 103) 당시 이탈리아에는 흉년이 들어 훈족은 군량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뿐 아니라 훈족 병사들 사이에서 질병이 크게 돌았다. 한 세기 뒤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가축과 포 강의 강물 외에는 먹을 것이 없었던 프랑크 군대처럼 이질과 설사로 고생했을까?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 역병이 어떤 병이었는지는 모른다.

마지막으로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보냈다는 원병 문제를 살펴보자. 동로마 군대의 파병은 아에티우스가 요청해서 이루어진 것이다.(Hughes, 339) 동로마로부터 병력 지원을 요청한 아에티우스는 어디에 있었을까? 해로를 통해 올 동로마 군대를 라벤나에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아니면 로마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볼로니아에 있었을까? 현존하는 사료들은 이에 대해 말이 없다. 확실한 것은 452년 아틸라 군과 로마군 사이의 큰 접전은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동로마 황제가 보낸 군대가 이탈리아로 온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동로마 군대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훈족의 본영이 있던 판노니아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묘하게도 당시 동로마 제국이 판노니아로 보낸 군대의 지휘관이 서로마의 아에티우스와 같은 이름의 아에티우스였다. (멘헨-헬펜, 138) 당시 서로마의 아에티우스 장군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틸라 군과 전면적 전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퇴각하는 아틸라 군을 후방에서 괴롭히는 정도였다.

동로마의 아에티우스 군대도 훈족의 본영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아틸라는 판노니아로 돌아와 즉각 동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미납된 공납 지불을 요구하며 돈이 지불되지 않으면 동로마를 황폐화시키겠다는 위협을 하였다. 마르키아누스 역시 전임 황제가 했던 공납을 바칠 마음이 없었다. 동로마 역시 훈족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아틸라가 죽었다는 소식이 느닷없이 날아들었다. 아틸라가 일디코라는 이름의 게르만족 처녀를 새로운 신부로 얻어 장가드는 날 밤 과도하게 술을 마셔 질식사하였다는 것이다. 아틸라의 급사로 인해 다뉴브 이북의 정치적 상황은 순식간에 돌변하게 된다.

 

참고서적

 

Otto J. Maenchen-Helfen, The World of the Huns : Studies in Their History and Cultur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3)

R. W. Burgess, The Chronicle of Hydatius and the Consularia Constantinopolitana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Ian Hughes, Aetius, Attila’s Nemesis (Pen & Sword,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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