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철학에세이 3 고결함에 대하여 (1)

황경선 연구위원

2020.06.22 | 조회 5119

철학바라보기 3

 

고결함에 대하여 (1)

 

지고자에 대한 욕망의 고결함은 그 자체로 지고자의 부름입니다.”(마라하지, I AM THAT)

 

아리안은 누구를 혹은 무엇을 말할까? 아리안은 일반적으로 기원전 1500년경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북부나 이란 지역으로 이주해 온 고대 민족 또는 독일인의 뿌리가 되는 족속 등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아리안은 종족의 이름이 아니라 문화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아리안은 고결한’, ‘고귀한’, ‘훌륭한이란 뜻이다. 어떤 삶을 영위하기에 고귀한 사람들 혹은 고결한 문화로 불렸을까?

Peter Wilberg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라는 자신의 글에서 아리안에 대한 Raljiv Malhotra의 설명을 인용한다. 다소 길지만, 아리안에 관한 정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리란 생각에 거의 그대로 여기에 다시 옮긴다.

 

인도의 문헌들은 'Aryan'을 종족의 이름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단지 고결한 문화를 가리킨다. 남인도 왕이나 인도 문명을 남동 아시아로 이식하는 역할을 했던 남인도 유랑민들이 스스로를 'Aryan'이라고 불렀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신비한 아리안 족을 고안해낸 것은 유럽 학자들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기독교 서구 문명이 품은 고귀함의 비밀을 드러내고 세계에 대한 서구의 종교적 정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있다. 나아가 이들은 아리안이 유럽의 종족을 가리켰다고 추정하면서, 유럽이 아리안 문명을 그들의 유산으로 권리 주장할 여지를 만들었다. 유럽인들은 신비한 아리안과 헤브라이즘의 유일신론을 자기들의 것으로 결합시켰다. 이러한 이중의 유산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숙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안 종족이란 이름은 대부분 1870년 이후에 그리고 대체로 영국에서 등장했다. 19세기 후반부 인도의 사정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을 때 스스로를 아리안이란 간주해왔던 인도 유럽어족은 자신들의 기원을 카스피해에서 발트 연안에 이르는 인도 바깥의 지역에서 찾게 되었다. 19세기 말에는 인도유럽어의 유래인 산스크리트어가 희랍어와 자매 언어로 간주되는 위상 변화와 다윈 진화론의 부상, 인종학의 발전이 얽히면서 인종주의가 나타났다. ‘아리안 종족주의는 단지 그 후 등장하는 나치즘 배후의 한 요인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들은 인종학이다. 반교회적 태도, 반유대주의, 진화론의 확산 그리고 과학적 진보의 목적론에 대한 믿음들이 1900년 무렵의 가장 강력한 정서였다. 서구인들은 발견되어야 할 모든 것들이 발견됐으며 그들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여겼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독일의 경우이다. 1900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 아리안 종족주의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 같이 일부 학계 안에서 확고하게 세워졌다. 처음에 독일 사상가들은 인도를 그들의 요람으로 추켜세웠다. 뒤에 가서 토착적인 독일 혈통의 기원을 구해야 할 필요에 따라 아리안들은 독일인들이며 인도인들은 덜 순수한 방계라고 공표되었다. 열악하고 가난한 인도 사회는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배타주의로 돌아서고 독일 민족주의를 옹호하게 만들었다. 1700년에서 1950년까지 인도에 대한 독일인들의 연구 분량은 놀라울 정도이다. 여기에는 당대에 가장 저명했던 일부 독일 사상가들의 많은 저술들도 포함된다. 그럼에도 오늘날 유럽사에 대한 교과서에서 인도의 영향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인도의 만() 자는 이러한 전용轉用의 상징이며 유럽의 유대인과 아시아의 인도인을 위협하고 억압하는 가공된 인종 이론의 결과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서구인들은 매우 드물다.

 

고결한, 고귀한 문화를 가리키는 아리안은 유럽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배타주의에 의해 종족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고, 나아가 그들의 기원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아리안에 대한 최종적인 것은 아니다. 여전히 아리안에 대한 정설은 마련돼 있지 않다. 이런 사정 속에서도 아리안의 뜻이 고결한’, ‘고귀한이란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인도 원주민과 달랐던 어떤 이주민들이 그런 뜻으로 스스로를 아리안이라고 불렀을까, 아니면 아리안들의 생활을 보고 고결하게 여긴 원주민들에 의해 그런 의미가 성립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독일어에서 아리안, 고결한을 뜻하는 말은 'edle'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Aryan'에 뿌리를 둔 'edle'의 시원적 의미를 통해서 'Aryan'의 내적 의미를 구한다. 그는 아리안에 대한 기존의 역사적, 고고학적 혹은 인종적 관심에서 벗어나 아리안의 본질을 유래와 본성에 머무는 것(Peter Wilberg, 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으로서 숙고한다(meditating). 이제 그에게 아리안에 대한 물음은 인간이 자신의 기원과 본질에 머묾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 혹은 인간됨은 사유에 있다. 그렇다면 사유가 유래하는, 곧 인간 본질이 기원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사유하게 하는 것일 터다. 사유는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사유하게 하는 것가장 사유되고자 하는 것으로서 존재이다. 존재란 하늘, , 인간 및 그 밖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중심’[]과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의 중력에 감싸여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로서 존재한다. “존재는 모든 존재자를 하나의 존재자로서 발원(ent-springen)”(Grundbgriffe)하게 하는 것이다.

중심을 차지하는 존재의 위상학적位相學的, 영역적 성격과 관련해 하이데거의 존재는 도가 사상의 도와 비교되기도 한다. 노자1장에서 도는 유와 무, ‘이름 불리는 것과 이름 없는 것무상한 것과 상주하는 것사이의 로 말해진다.(Nian-Nian Wang, a Comparative Study of Heidegger and Taoism on Human Nature) 도는 둘 사이의 사잇길’, 골짜기라는 영역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나아가 도의 길로부터 그 길 안에서 유와 무, ‘이름불리는 것이름 없는 것은 동일하다. 이때 동일성은 논리적인 그래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두 상이한 것이 하나의 동일한 중심[]에서 서로 속하면서 하나를 이루는 사태를 말한다. 그 동일성을 일러 현이라 한다[同謂之玄].

하나의 중심으로서 존재는 지각될 수 있는 것도 실체도 아니며 이성의 형식이나 범주도 아니다. 존재는 도대체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존재는 순수한 무와 같다. 따라서 도가 그렇듯 합리적, 개념적 파악으로 존재를 쥐려 할 때 존재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린다. “존재는 근거로 작용할 것이라는 모든 기대에 대한 거부이다.”(Grundbgriffe) 그래서 존재는 어디서나 비근거(Ab-grund)인 심연(Abgrund)이다. 실체로서 고정된 자리를 점하지 않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지만 동시에 어디나 있다. 나아가 모든 것들 사이에서 그것들을 하나로 불러 모아 고유함에 이르도록 하기에 있다. 이는 존재를 이행’, ‘머묾의 성격으로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이데거에서 존재는 은닉으로부터 발현發顯 또는 비[]은폐[]隱蔽의 이행이며 머묾이다. 존재는 자신을 열어 밝히면서 그 밝게 트임 안에 존재자를 감싸 그것들이 참되게 존재하도록 한다. “존재자 전체 가운데는 하나의 개방된 자리가 현성한다. 밝게 트임이 있다. 이 밝게 트임은, 존재자로부터 사유해보면, 존재자보다 더 있다(seiender). 이 환히 트이는 중심 자체가 마치 무와 같이 모든 존재자를 둥글게 감싼다.”(Holzwege) 사유하게 하는 것인 존재는 그렇게 밝게 트이며, 원으로 사방四方으로 영역화하면서 존재자를 간수하여 그것들이 자기의 본질 혹은 고유함으로 존재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사유하게 하는, 그래서 사유의 유래가 되는 것의 부름에 올바로 응대하는 사유는 환히 열리는 존재 개현開顯, 다시 말해 존재 진리를 담을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존재 발현이 머물 수 있는 그릇이 되고 궁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 본질로서의 사유는 그 자체 존재를 향한 개방성이어야 한다. 존재는 밝게 트이며 영역화하는 자신의 본질상 그러한 사유를 필요로 한다. 사유는 본래 우리를 향해 도래하는 것, 사유하게 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마음을 기울여 그리로 머물며 그것들을 간수하여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본질적 사유는 근본적으로 기도祈禱와 관련된다고 한다. 온 마음으로 사유하게 하는 것을 지키는 사유는 경건의 특별한 음조를 갖고 있으며 기도할 때의 그것을 가리킨다.” 왜냐 하면 이미 성스로운 것, 은혜로운 것으로 마음을 모음과 포괄적인 본질연관을 뜻하기 때문이다.(Was heißt Denken?)

이때 마음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 머묾은 이미 뒤로 물러섬이 작용하고 있다. 사유거리를 향해 나아가 불러 모음은 그것이 현존하도록 간수하는 것이며, 그 맞아들임은 뒤로 물러섬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유는 그와 같이 앞으로 나아감과 뒤로 물러섬이 ‘~이자 또한 ~인 방식으로 서로 속하는 원환적 구조로부터 자신을 개방하여 존재를 위한, 존재가 필요로 하는 자리를 내줄 수 있다. 사유는 존재의 부름에 따라 스스로 개현의 장(das Offene; die Ortschaft)이 되어, 존재가 비로소 그것의 본질로, 즉 비은폐의 머묾으로 현성現成하도록 지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존재 사유는 사유하게 하는 것존재이 그의 요구대로 사유되도록 자리를 내주는 개방성으로서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 본질인 사유는 존재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지고자에 대한 욕망의 고결함은 그 자체로 지고자의 부름입니다.”

이러한 사유는 이미 또 다른 사유이다. 무엇보다 형이상학과 오늘의 기술 시대를 지배하는 사유 방식, 즉 주객분리 위에서 무엇을 대상화하여 헤아리는 표상적, 계산적 사유와는 다른 평면에 놓여 있다. 계산적 사유는 계산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대상 앞에서 보다 유망하고 경제적인 가능성들을 계산한다. 계산적 사유는 하나의 전망에서 다음 전망으로 분주히 옮겨 다니며 결코 멈추지 않으며 마음이 모여져 있지 않다.”(Peter Wilberg, Heidegger, Yoga and Indian Thought) 계산적 사유방식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사용하고 바꾸고 폐기할 수 있는, 가용可用의 인적, 물적 자원으로 드러나는 기술 문명에서 극단에 이른다. 계산적 사유의 분망함은 결국 모든 것을 대상화하여 파악하고 장악하려는 의지로부터 추동된다.

반면 존재 사유는 그 같은 일체의 의지를 여의고 존재로 하여금 스스로 제 본질, 즉 진리로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존재에 맞갖은 사유는 차라리 기다림과 머묾의 성격을 갖는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다. “우리는 기다림 외 아무 것도 해서는 안된다.”(Gelassenheit) 하이데거는 그러한 자신의 사유를 'besinnen', 'andenken', 'besinnlich Denken 등으로 표현한다. 우리는 통상 이를 숙고’, ‘회상으로 옮기는데, 영미권에서는 'meditative thinking', 'meditation'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한편 인간 또한 존재의 부름에 의해 사유를 바침으로써 마침내 자기 본질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특출함은 그가 사유하는 본질로서 존재에 열려 있고, 존재 앞에 세워져 있으며, 존재에 관련된 채 머물면서 그렇게 존재에 상응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본래 이 상응(Entsprechung)의 관련으로 있으며, 다만 그 상응의 관련이다.”(Identität und Differenz) “실존”, “-(Ek-sistenz)”, “존재의 목자”, “존재의 파수꾼”, “존재의 이웃. 하이데거가 인간 본질을 부르는 이 호칭들은 한결같이 인간은 돌멩이나 나무처럼 단순히 눈앞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향해 나가 서있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임을 가리킨다. 따라서 존재 진리에 자신을 바침으로써 존재에 귀속함은 인간에게는 마침내 그의 본질을 얻는 일인 것이다. 비로소 존재의 가까움에서 존재의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에 대한 존재의 소환은 강요나 억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본질로 거주하도록 수락하는 호의며 인간의 사유는 그에 대한 답례이고 감사함이다.

이제 이로부터 하이데거가 말하는 아리안, ‘고결함의 의미, 자신의 기원과 본질에 머묾이 어떤 삶인지 분명해진다. 인간은 주체 중심의 모든 의지를 비우고 제 본질 유래인 존재[‘사유하게 하는 것’]를 끊임없이 마음을 다해 사유함으로써 존재로 하여금 그의 본질인 발현, 밝게 트임으로 머물도록 한다. 또한 동시에 이로써 그 자신 존재를 지키는 목자로서의 자기 참됨을 얻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편에서 극진히 마음을 모아 존재에 청종하는 사유는 그 은총에 대한 감사함이다. “고결한 마음은 사유의 본질이며 그로써 감사의 본질일 것이다.”(Gelassenheit) 고결함은 자신에게 본질을 허용한 존재를 향해 사유로써 자신을 바쳐 존재와 함께 속하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본질 유래에 머무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겐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고결한 사람이고, 아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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