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28회 마자르족의 스페인 원정(942)과 레흐펠트 전투(955)

김현일 연구위원

2017.03.30 | 조회 9877

■유목민 이야기 28회

 

 

마자르족의 스페인 원정(942)과 레흐펠트 전투(955)

 

 

마자르족은 헝가리 평원에 자리 잡은 후에 서유럽 지역에 대한 원정을 계속 하였는데 그것은 헝가리 원정과는 달리 영토를 점령하여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약탈을 위한 원정이었다. 인근의 오스트리아 지역과 체코슬로바키아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이탈리아 북부와 독일, 프랑스가 빈번한 침략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마자르족을 격퇴하기 힘들어 이들에게 공납을 약속하고 퇴각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물론 공납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다음해 다시 공격을 하고 그 대가를 받아내었다.

마자르족의 원정은 모두 45 회 정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성공률이 80 퍼센트가 넘었다고 한다. 서유럽으로의 원정은 955년 오토 1세의 동프랑크 왕국 군대에 의해 마자르족이 패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원정 가운데 가장 장거리 원정은 942년의 스페인 원정이었다.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로 거리만으로 봐서는 451년 훈족의 갈리아 원정에 앞선다. 당시 스페인은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회교도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 원정에 대한 기록은 유럽측 사료에는 없고 오로지 이븐 하얀’(Ibn Hayyan, 987-1075)이란 회교도 역사가가 남긴 사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스페인의 태반을 통치하던 코르도바 왕국의 고위 관리를 지낸 인물로 코르도바 왕국에 대한 역사서를 여러 권 남겼다고 하나 지금은 그 단편들만이 전한다.

그의 기록에서 우리는 먼저 당시 마자르 기병대가 이용한 루트를 알 수 있다. “안달루시아(당시 스페인을 이르는 명칭)에 이르기 위해 그들은 먼 거리를 지나왔는데 그 일부는 사막이었다. 그 여정은 롬바르디아를 거쳤다. 그들의 나라에서 롬바르디아를 가기 위해서는 8일간을 가야한다.” 마자르인들은 예전의 훈족처럼 헝가리에서 독일을 거쳐 프랑스로 온 것이 아니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가 거기서 남프랑스로 갔던 것이다. 남프랑스로부터 어떠한 루트를 거쳐서 스페인 땅으로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마자르족은 코르도바 왕국의 심장부인 안달루시아 지방까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피레네 산맥에 가까운 북부의 레리다, 우에스카, 바르바스트로 등의 도시들을 공격하는 데 그쳤다. 이 도시들은 프랑크 왕국과 가까운 변경도시들이었다.

942년 여름에 도착한 마자르족은 스페인 땅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말에게 먹일 꼴과 식량, 물이 부족하여 며칠 만에 퇴각하였다고 한다. 병참에 실패했던 것이다. 스페인의 회교도들에게 이들 마자르족은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쳤다가 바람 같이 사라진 이들 마자르족의 일부 병사들이 잡히지 않았더라면 이들이 어디서 온 사람들이었던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다섯 명의 포로가 잡혔는데 이들을 심문하여 마자르족이 어디서 사는 사람들이고 그들의 통치자들은 누구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또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탈리아 북부를 거쳐 스페인을 침략하였다는 것도 이들 포로들을 통해 알아내었다. 하얀에 의하면 이들 포로들은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칼리프의 호위병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마자르인들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954년에도 마자르 군대는 독일을 침공하였다. 당시 독일(동프랑크 왕국)에서는 로렌(로트링겐) 공과 슈바벤 공 등 여러 제후들이 국왕 오토 1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 세력이 외세인 마자르족을 불러들인 것이다. 마자르족은 동맹 제후들의 적들을 공격하고 약탈하였다. 라인 강 너머의 동프랑크 왕국과는 무관한 벨기에와 프랑스 땅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도시들과 수도원이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부르고뉴를 따라 남하한 마자르 부대는 프로방스까지 진출하였다. 당시 프로방스의 해안가 지역인 프락시네트(오늘날의 라 가르드-프레네)는 사라센이 점령하고 있던 곳인데 이곳에서 마자르족은 회교도들과도 싸웠다.

다음 해인 955년 여름에는 다시 반란 지도자들의 호소에 응하여 독일을 침공하였다. 마자르족은 바이에른과 그 북쪽에 인근한 프랑코니아(프랑켄) 지방을 공격하고 8월에는 슈바벤 지방의 중심도시 아우크스부르크를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810일 아우크스부르크 남쪽 레흐 강변의 벌판에서 마자르족과 오토 1세의 독일 군대 사이에 결전이 벌어졌다. 오토 1세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근접전으로 맞붙은 싸움에서 대열을 성공적으로 잘 유지하여 마자르 기병대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근접전에서 기마궁수인 마자르족은 자신들의 장기인 치고 달아나는 식의 전술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없었다.

마자르족은 많은 희생자를 내고 흩어져 달아났다. 포로로 붙잡힌 자들은 귀와 코를 베인 후 헝가리로 보내졌다. 말리 지쳐서 더 도망갈 수 없었던 자들은 인근의 마을에 숨었다가 불에 타 죽기도 하고 주민들에게 잡혀서 죽기도 하였다. 이 전투에서 마자르족은 5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불크수를 비롯한 세 명의 마자르족 족장도 잡혀서 처형되었다.

레흐펠트 전투 이후 마자르족은 더 이상 서유럽을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동쪽의 비잔틴 제국의 영토로 공격의 방향을 바꾸었는데 959년의 비잔틴 침략은 비잔틴 제국이 약속한 공납을 지불하지 않았던 것이 구실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까지 진출하며 약탈을 행한 마자르족은 귀환하던 중에 비잔틴 제국 군대의 매복공격으로 패주하였다. 마자르족의 비잔틴 공격은 970년 정도까지 계속되고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레흐펠트 전투는 훈족의 공격으로부터 시작된 동양 유목민족의 공세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린 사건이었다. 마자르족은 10세기 말 이후 유럽 나라들에 대한 약탈원정 습관을 버리고 유럽인들 사이에 동화되어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신실한 이스트반 왕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그러한 동화과정의 정점이었다. 마자르인들의 기독교 헝가리 왕국 건설과 더불어 370년경 훈족의 이동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이동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Heather) 유럽의 진정한 탄생이 이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C. Bowlus, The Battle of Lechfeld and its aftermath, August 955 : The End of the Age of Migrations in the Latin West (Ashgate, 2005)

P. Heather, Empires and Barbarians : The Fall of Rome and the Birth of Europe (Oxford,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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