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서양사산책 1. 알렉산더대왕과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 대왕은 그리스를 통일하고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여 최초로 동서양을 한 국가 아래 통일한 인물이다. 그의 스승이 바로 서양 철학의 비조인 아리스토텔레스였다.

2020.02.07 | 조회 9571

알렉산더대왕과 아리스토텔레스

 

김현일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알렉산더 대왕(BCE 356-323)에 대해서는 고대부터 여러 사람들이 전기를 써는데 그 가운데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으로는 1세기에 로마인 퀸투스 쿠르티우스(Quintus Curtius Rufus)가 쓴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 2세기에 그리스의 유명 역사가 아리안(Arrian of Nicomedia, c.89-c.160)이 쓴 알렉산더 원정기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 로마의 영웅들 전기를 모은 플루타르크(c.46-c.120)영웅전에도 알렉산더이 올라 있다. 플루타르크 역시 두 사람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의 영웅전은 원제가 대비열전 Bioi paralleloi이라고 되어 있는데 역사에서 비슷한 역할을 한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을 묶어서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테네를 세운 테세우스와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를 각각 서술한 다음 그 둘을 비교하는 논평을 덧붙이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알렉산더는 로마의 카이사르와 대비되고 있지만 두 사람에 대한 비교논평은 붙어 있지 않다. 플루타르크의 책은 엄밀히 말하자면 역사서라기보다는 인물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전기이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는 앞의 두 사람 책이 더 높다.

아리안의 알렉산더 원정기는 알렉산더가 왕좌에 오른 후 즉각 개시한 그리스 원정부터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청소년 시절과 그가 받은 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우리는 쿠르티우스의 알렉산더 대왕의 역사1권에서 알렉산더 유소년기와 청년기의 교육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E 384-322)는 그리스 북부의 스타기라(Stagira) 시 출신으로서 부친은 마케도니아 왕실의 시의였다. 그 때문에 마케도니아 왕실과 친분을 갖고 있었다. 필립포스 왕은 아들이 태어나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편지를 보내 장차 아들의 스승이 되어줄 것은 부탁하였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철학자 플라톤 밑에서 학문을 닦고 있었다. 왕실의 교사로 내정된 것을 듣고 그는 소아시아로 가서 그곳에서 헤르미아스와 함께 3년을 보냈다. 헤르미아스는 후일 그의 장인이 되는 사람으로서 함께 플라톤 밑에서 공부하였던 동문이다. 헤르미아스는 아타르네아라는 도시의 총독을 맡게 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헤르미아스의 통치를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뒤로는 레스보스 섬의 미틸레네에서 친구 테오프라투스와 함께 2년을 거주하였다. 그 동안 어린 알렉산더는 유모 헬라니카 뿐 아니라 레오니다스와 리시마쿠스라는 두 선생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알렉산더가 13세기 되자 필립포스 왕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정식으로 왕자의 교사로 초빙하였다. 그는 알렉산더에게 문학, 인문, 과학의 초보 뿐 아니라 윤리도 가르쳐줄 것을 요청하였다. 윤리를 덧붙인 것은 자신이 한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쿠르티우스에 의하면 당시 미틸레네에 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립포스 왕의 초빙편지를 받자 주저 없이 마케도니아의 왕실 학교의 스승이 되었다. 알렉산더만이 아니라 알렉산더와 함께 왕실에서 자라던 귀족 자제들도 그곳에서 배웠다. 후일 알렉산더의 동료로서 함께 싸웠던 프톨레마이오스, 카산데르 등이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 사후 이집트의 왕이 되었으며 카산데르는 마케도니아 왕좌를 이어받았다.

알렉산더의 말에 의하면 부친 필립포스 왕은 자신을 낳아주었으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에게 덕과 명예를 갖고 사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알렉산더는 부친의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20세에 졸지에 왕위에 올랐는데 (BCE 336) 그 다음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갔다. 그곳에서 플라톤의 아카데미 학당을 잇는 리케움 학당을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BCE 323년 알렉산더가 바빌론에서 병사하자 아테네에서 반마케도니아 여론이 일어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들에 불경하다는 비난도 제기되었는데 아테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흐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벗어나 에우보이아 섬의 칼키스로 피신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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