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제49회 시베리아 정복의 관문 시비르 한국

김현일 연구위원

2018.08.24 | 조회 8996

유목민 이야기 49

 

시베리아 정복의 관문 시비르 한국

 

카잔과 아스트라칸 한국을 점령한 후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는 카스피 해 연안까지 확대되었다. 러시아 상인들도 카스피 해 너머의 페르시아 상인들 및 중앙아시아의 부하라 상인들과 거래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업 활동에는 큰 위험이 수반되었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일대로부터 남부 러시아 초원지대에서 살던 반독립적인 코사크들도 카스피 해 연안까지 진출하여 오가는 카라반들을 대상으로 약탈행각을 자행한 것이다. 심지어는 차르가 페르시아에 파견한 사절단도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볼가 하류 지역이 돈 코사크에 의해 실질적으로 지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코사크인들은 단일한 종족은 아니고 자유로운 생활을 갈구하여 주변 여러 공국들로부터 도망쳐온 사람들이 돈 강 주변에 정착하면서 생겨났는데 코사크라는 말은 유랑자라는 뜻으로 카자흐와 같은 어원에서 왔다. 이들 가운데에는 슬라브 족 외에도 헝가리 계통이나 카프카즈 지방 출신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점차 무리를 지어 우두머리를 선출하고 군사집단이 되었다. 코사크들은 대부분 기독교도들이어서 모스크바 공국은 타타르인들에 대한 투쟁에 이들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모스크바 공국에 군사적 도움을 주었다고 해서 코사크인들의 약탈행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차르 이반 4세는 볼가,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서의 이러한 약탈과 무질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 1577년 이반 4세는 군대를 파견하여 카스피 해 연안 지역의 코사크 산적들을 소탕하였다. 코사크들의 일부는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히고 또 일부는 도주하였는데 도주자들 가운데 한 무리는 카잔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무려 6천 명이나 되었던 이 집단을 이끈 우두머리는 예르막 티모베프라는 인물이었다. 러시아 역사에서 시베리아 정복의 문을 연 이 사람이 이끄는 코사크 무리는 카잔에서 우랄 산맥쪽으로 카마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들은 우랄 산맥 밑의 러시아인 정착촌을 만났는데 재벌가인 스트로가노프 가문이 소유하였던 오렐 고로도크라는 곳이었다.

스트로가노프 가는 모스크바 대공 정부에 자금 지원을 하여 그 대가로 많은 토지를 불하받고 또 사업상의 이권을 챙겨서 큰 부를 축적하였던 가문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바실리 3세가 몽골 인들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그 몸값으로 20만 루블을 조정에 바쳤다고 한다. 소금광산과 모피교역이 이 가문의 양대 사업이었는데 이들은 모피무역과 광산개발을 위해 일찌감치 시베리아 쪽으로 진출하였다.

당시 우랄 산맥 쪽의 서부 시베리아에는 여러 타타르인 집단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이 시비르 한국이었다. 오늘날의 토볼스크 주가 그 영역에 해당하는데 수도라고 할 만한 곳은 오늘날의 토볼스크 근처 토볼 강과 이르티쉬 강의 합류지점 근처에 있던 카쉴리크였다. 카잔으로부터 무려 1200 km 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스트로가노프 가는 우랄 산지 여러 곳에 정착촌과 요새를 세우고 있었는데 바쉬키르, 케레미스, 오스티아크(핀족 계통) 등 여러 현지 족속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스트로가노프 가는 무력을 동원하여 굴복시키려 하였다. 시베리아 지역의 맹주 시비르 칸의 입장에서는 이는 시비르 한국에 대한 도전이었다. 시비르 한국의 쿠춤 칸은 1573년 군대를 파견하여 스트로가노프 가가 세운 정착촌을 파괴하려 하였다. 스트로가노프 가는 차르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르 정부는 스트로가노프 가에게 토볼 강변에 요새를 세우고 또 대포를 설치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었다. 더 나아가 사병집단을 모집하고 보유할 권리도 부여해주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철과 주석, 납 등의 광물을 채굴할 권리도 주었으며 부하라 및 카자흐 인들과 자유롭게 세금 부담 없이 거래할 수 있는 상업상의 특권도 주었다. 대신에 시비르 한국을 차르의 신하로 만들기 위한 선봉에 서줄 것을 명하였다. 이러한 특혜조처는 스트로가노프 가의 요청이 있자 지체 없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스크로가노프 가에게는 부랑자 출신의 일꾼들은 있었지만 충분한 병력이 없어 시비르 한국에 대한 원정을 바로 실행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 때 예르막 코사크 집단이 도착한 것이다. 스트로가노프 가는 군사집단인 코사크인들을 환대하면서 이들을 타타르 원정에 나서도록 부추겼다. 코사크인들도 타타르인들에 대한 원정이 부와 세력을 키울 기회여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1578년 예르막의 1차 원정은 예상과는 달리 성공하지 못했다. 준비해간 식량이 일찍 떨어진 것이다. 오렐로 돌아온 예르막은 스트로가노프 가로부터 식량과 무기를 충분히 얻어내었다. 예르막의 코사크 부대는 이제 스트로가노프 가에서 제공한 머스켓 총으로 무장하고 대포도 3분이나 보유하였다. 또 군기도 러시아 군대와 같은 성상을 그린 깃발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제 예르막 휘하의 코사크 부대가 단순한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사병집단의 성격을 넘어 러시아 차르 군대의 일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르막의 2차 원정은 때로는 육로로, 때로는 강을 타고 배를 저어가는 방식이었는데 시비르 한국의 요새지 근처까지 가는 데 무려 1년 반 이상이나 걸렸다. 도중에 곳곳에서 접전이 벌어져 병력 손실도 컸다. 이르티쉬 강 근처에 도착해서는 남은 병력이 출발할 때의 1/10 에 불과한 500명 정도였다. 수적으로는 시비르 한국이 압도적이었지만 전투는 코삭크 부대의 승리로 돌아갔다. 예르막은 시비르 요새를 점령하고 그곳을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 그러자 주변의 여러 족속들도 앞 다투어 예르막에 복속하고 공납을 바쳤다. 그는 졸지에 코사크 산적두목에서 왕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물론 타타르인들이 순순히 그의 지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도망간 쿠춤 칸의 지시를 받은 타타르인들은 여러 곳에서 봉기하여 예르막의 지배에 저항하였다. 휘하의 병력도 많지 않았던 예르막은 차르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는 차르의 이름으로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으며 토착민들은 공납을 바치기로 약속했다는 보고서와 함께 최고급 모피를 선물로 진상하였다. 차르 이반 4세 역시 자신의 이름으로 영토를 크게 넓힌 예르막의 공적을 치하하였다. 예르막이 보낸 사신들은 궁정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예전에 예르막이 저질렀던 범죄행각들도 모두 사면하였다. 차르가 보낸 원군이 곧 시베리아 총독으로 임명된 볼코스키 공과 함께 도착하였다. 이러한 차르의 지원으로 기세가 오른 예르막은 서쪽으로는 타프다 강 수원지까지, 북동쪽으로는 오브 강이 이르티쉬 강에 합류하는 지점까지 정복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585년 이르티쉬 강변에 있는 쿠룰라 요새를 공격하여 실패한 후 돌아오던 중 쿠춤 칸의 기습공격으로 숨졌다. 그날 300 명의 러시아 군은 한 사람만 살아남고 쿠춤 칸 부대에 의해 모두 살해되었다고 한다.

시비르 요새를 탈환한 쿠춤 칸은 러시아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타타르 귀족들이 모두 그를 따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쿠춤 칸이 시비르 한국에 이슬람 신앙을 적극 도입하려고 했는데 이러한 종교적 이유로 쿠춤 칸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러시아 당국 역시 그의 저항을 묵인하지 않았다. 1586년 수킨 휘하의 러시아 군대가 이번에는 우랄 산맥 넘어서 오브 강쪽으로 진격해왔다. 수킨은 7월에 투라 강변에 있던 옛 타타르 요새 칭기에 도착하였다. 이 칭기 요새 부근에 최초의 시베리아 신도시가 세웠다. 이 도시가 바로 투멘이다.

러시아 당국에 의해 쫓겨난 쿠춤 칸은 자신을 따르는 유목민 무리를 이끌고 이르티쉬 강 남쪽 초원으로 가서 그곳에서 새로운 한국을 세우려고 하였다. 러시아에 야삭(공납)을 바치는 예전 시비르 한국의 신민들을 상대로 약탈원정을 더러 감행하였는데 1590년에는 옛 시비르 한국의 본영이 있던 토볼스크 근처까지 원정을 하였다. 그 때 토볼스크 총독이 이끄는 러시아 군은 그 부인 둘과 아들 아불카이르를 포로로 생포할 수 있었다. 1594년 이르티쉬 강 상류의 타라 요새는 쿠춤 칸의 준동을 막기 위해 세워진 것인데 이 요새의 건설에는 타타르 족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포로로 잡혀 있는 아불카이르를 이용하여 쿠춤 칸이 러시아에 항복하도록 회유하였지만 쿠춤 칸은 이르티쉬 강을 경계로 그 이남의 땅을 요구하면서 러시아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1598년 오브 강 근처에서 700명의 러시아 병사와 300명의 타타르 병사로 이루어진 러시아 군의 습격으로 쿠춤의 병력은 궤멸하였다. 당시 그를 따르던 집단은 500 명에 불과하였는데 그 절반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도망가거나 포로로 잡혔다. 당시 잡힌 포로들 가운데에는 쿠춤 칸의 부인이 여덟 명과 다섯 명의 자식들이 있었다고 한다. (하워드, p.1000) 당시 전투를 지휘하였던 러시아 지휘관 보예이코프 공은 투라 요새로 돌아가 러시아 황제에게 승전보를 보냈다. 당시 러시아 황제는 등극한 지 얼마 안 되는 타타르계의 보리스 고두노프였다. 보예이코프 공은 이제 시베리아는 이론의 여지없이 러시아의 땅이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물론 시베리아 정복이 끝나려면 아직도 반세기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였다. 시베리아 정복은 러시아인들이 태평양 연안까지 도달함으로써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쿠춤 칸이 사라짐으로 해서 시베리아 정복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은 사라졌다. 이제 시베리아 정복이 급속히 진행될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참고로 쿠춤 칸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1598년 오브 강 전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하워드의 주장에 따르면 전투에서 패한 쿠춤 칸은 이르티쉬 강을 따라 그 상류지역으로 도주하였다. 그리하여 칼묵인들의 땅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재기를 모색하기 위해 칼묵인들의 말을 훔치다가 칼묵인들의 추격을 받아 추종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자신은 노가이인들에게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노가이족은 쿠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가이인들은 쿠춤 칸의 부친으로부터 학대를 받은 적이 있는데 자신들에게 피난처를 찾아온 그 아들을 죽임으로써 복수를 하였다.

 

참고문헌

 

Gerhard F. Müller et Peter Pallas, Conquest of Siberia (1842)

Henry Howarth, History of the Mongols from the 9th Century to the 19th century. Part II, Division II. (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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