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이집트문명을 찾아서

김현일

2013.07.11 | 조회 13614

이집트문명을 찾아서

 

글: 김현일

 


1.

 

서양고대 문명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수메르문명과 이집트문명을 만나게 된다. 인류의 최고문명이라 일컬어지는 수메르문명은 바빌로니아로 계승되었다. 이집트문명은 수메르문명에 비해   500년 정도 이후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리스문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최근 학계에서도 그리스문명의 기원이 이집트에 있다는 흥미로운 주장으로 주목을 끌고 있는 사람이 있다. 《블랙 아테나》의 저자 마틴 버낼(Martin Bernal) 교수가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버낼에 의하면 자신의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한다.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 스스로가 이집트문명이 그리스보다 훨씬 오랜 문명이며 그리스가 이집트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왔음을 인정하였다. 예를 들어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그런 대표적인 저자인데 그에게 이집트는 그리스 문명의 원천이자 교사였다.


헤로도토스는 말할 것도 없고 철학자 플라톤, 그리고 그보다 수 세기 전의 인물인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고대 그리스 7대 현인 중 한 사람인 솔론도 학문과 지혜를 얻기 위해 이집트로 여행을 하였다. 고대 그리스 지식인들이 이집트로 여행을 가서 이집트의 사상과 학문을 배우는 것은 당시에는 일반화된 일이었다. 후대의 로마인들이 학문을 배우기 위해 배를 타고 그리스로 온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이집트는 학문과 지혜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학문과 지혜를 찾아 이집트로 간 그리스인들은 이집트의 신전들로 갔다. 당시 이집트의 사제들이 지식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 오래된 파피루스 책을 펼쳐놓고 옛 역사의 비밀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2.

 

BCE 300년경의 사람 마네토(Manetho)도 그런 이집트 사제의 한 사람이었다. 더욱이 그는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왕들과도 친했던 그야말로 고위층 인사였다. 이 마네토라는 인물이 그리스 말로 이집트 역사를 썼는데 이 《아에귑티카》(이집트사)는 전부가 전해지지는 않지만 그 단편들이 여러 사람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의 역사서는 왕조구분을 하였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전까지 모두 31개의 왕조를 들고 그 왕들의 이름과 치세를 기록하였다. 물론 일부 왕조들의 경우 뭉뚱그려 모두 몇 명이 도합 몇 년을 통치했다는 식으로 되어 있는 곳도 있다. 마네토의 왕조구분은 오늘날에도 학자들에 의해 그대로 사용된다.


마네토에 의하면 이집트는 파라오가 통치하기 이전에는 신들이나 반신半神들이 다스렸다고 한다. 역사시대 이전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신화시대였던 것이다.


반면 제1 왕조의 기록은 전적으로 인간에 국한되어 있다. 제1 왕조는 상하 이집트를 통일한 메네스 왕으로부터 시작된다. 즉 그 이전 이집트는 나일강 상류 지역의 상이집트와 델타 지역의 하이집트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말이다. 메네스 왕은 60년을 통치한 후 하마에 물려 죽었다고 한다. 아마 나일강변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하마의 습격으로 죽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초대 파라오에 대해서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도 기록을 남겨놓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메네스의 이름이 ‘민’이라 나오는데 나일 강에 제방을 쌓아 그 물길을 돌리고 물길이 차단된 곳에 멤피스 시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나일 강 치수사업이 초대 파라오의 주요사업이었던 것이다. 그는 또 거대한 헤파이스토스 신전을 멤피스에 세웠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이집트 사제들로부터 옛 역사를 들었는데 그들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보면서 메네스의 뒤를 이은 330명의 역대 왕들의 이름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왕명록이 작성되어 사원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꾼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보기에 좀 인상적인 몇몇 파라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먼저 ‘세소스트리스’라는 이름의 왕인데 이는 마네토의 책에는 제12왕조의 세 번째 왕으로 나온다. 마네토의 말에 따르면 세소스트리스는 전아시아 뿐 아니라 트라키아까지 유럽도 정복하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아시아는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의미한다. 원정한 지역의 용감한 족속을 위해서는 남자의 성기가 새겨진 비석을 세우고 비겁한 족속에게는 여자의 성기가 새겨진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이 직접 이러한 비석을 시리아와 소아시아에서 보았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 2권 106)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 정복 왕은 엄청난 포로들을 운하공사에 동원하여 이집트를 운하의 나라로 만들었다. 도처에 운하가 생기는 바람에 이집트는 본의 아니게 말과 마차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3.

 

헤로도토스는 파라오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이집트인들의 신앙과 관습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이런 면에서 그의 《역사》는 인류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다. “거의 모든 신들의 이름이 이집트에서 헬라스(그리스)로 도입되었다. 나는 신들의 이름이 비헬라스인들에게서 유래했음을 몸소 탐문하여 알아냈으며 대개 이집트에서 유래하였다고 확신한다.” 그리스의 종교가 이집트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해주는 말이다. 헬라스의 원주민을 헤로도토스는 ‘펠라스고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원래는 어떤 신에게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나 이집트로부터 신들의 이름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한 신들의 이름이 후대 헬라스인들에게로 그대로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그의 역사책에서 또 그리스의 북서부에 위치한 도도네 신탁소의 기원도 이집트에 있다고 소개한다. 도도네 신탁소는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 된 신탁소로 그 명성이 델포이 신탁소에 버금가는 곳이었다. 이집트 사제들에 의하면 테베의 두 여사제들이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납치되어 하나는 리비아에 팔려가고 다른 한 여자는 헬라스로 팔려가 그 두 나라에 신탁소를 세웠다. 그런데 헤로도토스가 만나본 도도네의 여사제들도 헤로도토스에게 그러한 이집트 기원설이 맞음을 확인해주었다. 헤로도토스는 또 축제와 행렬과 제물 바치는 의식을 세상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이집트인들이라고 하면서 헬라스인들은 그것을 최근에 배웠을 따름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4.

 

헤로도토스는 자기 시대에 가까운 왕들을 포함하여 세소스트리스 이후 여러 왕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대 역사가들에게 큰 관심을 끄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관점 내지 문제의식이 달라서였을까? 제18 왕조의 왕인 아케나톤 (재위 BCE 1353-1336)의 원래 이름은 ‘아멘호테프’인데 제 18 왕조에는 그 말고도 아멘호테프라 불린 왕이 셋이나 더 있었다. (아멘호테프는 그리스어로는 ‘아메노피스’로 표기되었다)


아케나톤 왕은 역사에서 오랫동안 잊혀져온 인물이었다. 헤로도토스나 마네토 같은 고대 역사가들이 거의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왕이 세운 도읍인 ‘엘 아르마나’가 19세기 유럽인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아케나톤 왕의 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아케나톤은 이집트의 전통적인 다신론 신앙을 폐하고 태양신인 아텐 신을 유일신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를 국교로 선포하는 혁명적인 변화를 꾀한 인물이다. 아케나톤은 먼저 대사제로부터 신의 재산을 관리하는 권한을 박탈하고 그 권력의 원천을 제거하였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톤을 섬기는 자”라는 뜻의 ‘아크-엔-아톤’으로 바꾸고 수도도 테베를 버리고 500 킬로미터나 북쪽에 떨어져 있는 ‘아케타톤’을 세웠다. 이 아케타톤이 현재의 엘 아르마나이다. 새로운 파라오는 예법으로 강요되던 인습들도 과감히 철폐하였다. (엘리아데, 《세계종교사 1권》 169쪽) 그러나 일신론을 도입하려는 그의 종교혁명은 그의 대를 넘어서지 못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들의 마음과 관습에 뿌리내린 전통적 종교를 왕의 개혁조처들로 뿌리 뽑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 아들 투탄카멘에 의해 전통적인 종교가 회복하고 사제들과의 관계도 회복되었다. 수도도 다시 테베로 옮겼다. 부왕의 종교혁명의 흔적은 아들에 의해 말살되었다. 시대를 앞선 유일신 혁명은 수백년이 지난 후 이집트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태인들에 의해 완수되게 된다.


아케나톤의 아들인 투탄카멘의 묘소는 1922년에 발굴되었는데 살아 있는 듯한 황금가면을 쓴 그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최근에는 DNA 테스트 결과 그가 아케나톤의 아들임이 입증되었다. 투탄카멘 왕은 18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가 없이 죽었다.

 


5.

 

그리스 세계에서는 역사를 쓰는 것은 상당히 인기 있는 작업이었던 것 같다. 물론 역사가는 취미로만 역사를 연구하고 쓰는 것이 아니라 책을 써서 그것으로 생계를 영위하였다. 그야말로 직업적인 역사가였다. 디오도루스 시클루스는 ‘시칠리아 사람 디오도루스’라는 뜻인데 명성을 떨친고대 그리스 역사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가 고향 시칠리아 섬은 지금은 이탈리아 영토이지만 당시에는 남부 이탈리아로 더불어 그리스인들이 이주해서 살던 그리스어권이었다. 이 지역은 ‘마그나 그레키아’(대그리스)라 불리웠다. 아마 그리스 본토보다 더 번창하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BCE 1세기 카이사르 시대에 살았던 디오도루스는 헤로도투스의 전통을 이어 일국의 역사가 아니라 세계사를 쓰려고 시도했던 사람이다.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카》라는 거창한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책은 그리스와 페르시아, 로마는 말할 것도 없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아라비아, 스키타이, 북아프리카를 포괄한 40권으로 이루어졌다. 현재 1권부터 5권, 11권부터 20권까지 모두 15권이 전한다. 제1권이 이집트 역사인데 그가 이집트를 먼저 다루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신들이 이집트에서 탄생하였다고 사람들이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집트인들은 인간이 이집트에서 먼저 탄생하였다고 주장한다.


디오도루스는 이집트인들의 신앙과 신화를 잘 정리해서 전해준다. 그에 의하면 이집트인들은 오시리스와 이시스 신을 특히 좋아했는데 오시리스는 인간들끼리 잡아먹는 것을 금하고 대신 농업을 가르쳐주었다. 그 배우자 이시스 여신 역시 밀과 보리로 빵을 만드는 방법을 발명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약제를 발견하여 인간들을 병에서 건져준 신이기도 하다. 오시리스는 또 그리스에서는 디오니시우스로 숭배되었다고 하는데 즉 포도를 재배하는 법과 포도주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준 신이다. 그런데 이 오시리스는 동생 세트에 의해 살해되었다가 이시스의 노력으로 부활하여 하계를 다스리는 신이 되었다. 그의 부활은 봄에 되돌아오는 식물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오시리스는 식물의 생장을 지배할 뿐 아니라 망자들을 다스리는 신이 된 것이다.


오시리스와 이시스 숭배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가 지배하면서 국제적인 종교로 발전하였다. 그리스 출신의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이집트인들의 통치를 위해 이집트인들의 토착종교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부터 오시리스는 ‘세라피스’라는 이름으로 주로 불리게 되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왕실의 후원 하에 세라피스 숭배는 그리스권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고 BCE 1세기 로마 당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로마 사회 속으로도 급속히 파고들었다. 로마 당국은 이 이집트 종교를 금지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1세기 전반의 칼리굴라 황제는 이시스 신전을 로마 시에 세움으로써 세라피스 숭배를 공인하였다. 이집트 종교의 뒤를 따라 나일 강변에 있던 스핑크스, 오벨리스크 등의 석조기념물들이 황제의 명에 의해 로마로 운송되고 또 이집트 스타일의 신상들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종교와 더불어 이집트문화가 로마제국 내로 확산된 것이다.


세라피스 교는 통일적인 교리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종교사가 프란츠 퀴몽에 의하면 여러 가지 잡다한 전통들과 가르침들이 혼합되어 있어 명확한 교리가 없는 세라피스 교는 그 대신 정교한 의식(ritual)을 통해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F. Cumont, The Oriental Religions in the Roman Paganism) 세라피스 교에는 의식을 통해 신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었다. 정해진 주문과 동작이 매우 중시되었다. 세라피스 교의 의식은 신전 내에서만 행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거행되는 여러 의식은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마디로 말해 감정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세라피스 교가 가진 장점은 사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다. 세라피스 교는 의식을 준행하는 신자에게 사후에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신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을 하였다.


소아시아 지방에서 들어온 미트라 교와 더불어 로마 제국에서 널리 행해졌던 이집트의 세라피스 숭배는 4세기 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하면서 급속히 사라지게 된다. 세라피스 숭배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도들이 세라피스 신전(세라페움)을 방화, 파괴하였던 것은 세라피스 교에 대한 국가적 탄압을 예고해주었다.

 

 

6.

 

20세기의 걸출한 문명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상 현존하였던 21개의 문명을 확인하고 그들 사이의 계승관계를 파악하였다. 그는 이들 21개 문명 가운데 이집트 문명만이 그 어버이 문명도 없고 아들 문명도 없었던 유일한 문명이라고 지적하였다. (박광순 역, 《역사의 연구》 1권 2장 문명의 비교연구) 그는 4000년 동안 존속하였던 이집트문명의 절반 이상이 창조적 활력이 없는 쇠퇴단계 즉 거대한 종장이었다고 규정한다. 토인비는 그 증거로 아케나톤의 종교혁명의 실패를 든다. 오시리스 교회와 이집트의 죽어가는 사회가 결합하여 ‘일종의 사회적 콘크리트’를 만들어내어 사회적 활력을 억압하였는데 아케나톤의 종교혁명은 이 콘크리트를 파괴하고 죽어가는 이집트 사회를 살릴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문화가 오시리스 교를 통해 로마제국으로 파고들었으며 고전기 그리스인들조차 이집트문명으로부터 많은 배움을 얻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토인비의 부정적 판단을 그대로 따르기는 주저된다. 토인비는 이집트문명에서 종교가 엄청난 힘을 행사하였다고 보는데 최근에 학자들은 넓은 의미의 이집트 철학이 그리스와 근대 초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발견하였다. 바로 ‘헤르메스주의’ (Hermeticism)이다. BCE 3세기부터 AD 3세기 사이에 발전하였던 헤르메스주의는 영지주의를 통하여 기독교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신플라톤주의의 탄생에도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근대 유럽의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 토마소 캄파넬라, 아이삭 뉴턴 그리고 계몽주의 운동의 선구적 조직인 프리메이슨 조직도 헤르메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레이엄 핸콕, 로버트 보발, 《탤리즈만 : 이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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