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34회 셀주크 투르크의 기원을 찾아 : 오구즈 투르크

김현일 연구위원

2017.08.17 | 조회 10245

유목민 이야기 34

 

 

셀주크 투르크의 기원을 찾아 : 오구즈 투르크

 

 

오늘날 터키 공화국이 위치하고 있는 땅을 고대 서양인들은 소아시아혹은 아나톨리아라고 불렀다. 아나톨리아는 해가 뜨는 땅이라는 그리스 말이다. 그리스인들이 볼 때 소아시아 지역은 그들의 동쪽에 위치해 있었으니 말이다.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 제국시대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어 자리 잡은 기독교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바이블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모두 이곳에 있었다. 오늘날 유명한 성지순례 대상의 하나가 된 에페수스는 그 가운데 으뜸이었다. 비잔틴 제국 하에서도 오랫동안 번창하였던 소아시아 지역은 11세기 중엽 이후 급속히 투르크 족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란과 이라크 지역을 점령한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고 소아시아로 세력을 뻗쳐왔다.

1071년 만치케르트 전투는 셀주크 투르크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한판 승부였다. 유럽사 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전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전투는 오늘날의 터키 동북부에 위치한 곳에서 벌어졌는데 비잔틴 제국은 셀주크 제국 군대에 대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디오게네스가 포로로 잡혔다. 셀주크 제국 황제 알프 아르슬란은 로마노스 황제를 살려주었다. 단지 셀주크 제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 몸값으로 약속된 액수를 매년 지불할 것 등을 요구하고 8일만에 풀어주었다. 어떠한 영토상의 요구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 전투를 계기로 소아시아 지역은 투르크인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소규모 집단으로 이루어진 투르크 족이 대거 이주하여 정착하였는데 물론 만치케르트 전투 이후 내분에 빠진 비잔틴 제국은 그러한 투르크 족의 이주 물결을 통제할 수 없었다. 밀려온 투르크족은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얼마 후에는 중동 일대를 지배하였다.

11세기에 비잔틴 제국을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한 이러한 투르크 족은 어디서 온 사람들이었을까? 이들은 오구즈 투르크로 불리던 사람들인데 8세기경 아랄 해 동쪽의 초원지대, 시르다리야 강 주변에 정착하였다.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서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옥수스 강 즉 아무다리야 강 동쪽이라서 트란스옥사니아라고도 부른다) 7세기 중반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는 오구즈, 카를룩, 위구르, 키르키즈 족 등 다양한 족속들 내지 부족연합들이 서로 각축하였는데 오구즈 투르크는 그러한 경쟁에서 밀려 서쪽으로 이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카스피 해 동쪽에 정착한 오구즈 투르크인들은 그곳을 기반으로 돈 강 지역으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페체네그인들은 이들에게 쫓겨 흑해 북안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루스 초기연대기토르키로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이 오구즈 투르크인들인데 985년조에 의하면 블라디미르 공이 볼가 불가르를 공격하였을 때 이들을 동맹으로 동원하였다고 한다. 블라디미르 자신은 배를 이용하여 강으로 진격하였고 투르크인들은 말을 타고 육로로 진격하였다. 수륙병진 작전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70 여년 뒤 야로슬라블 공의 세 아들들은 수륙 앙면으로 투르크인들을 공격하여 그들을 굴복시키고 몰아내었다. (1060)

이후 오구즈 투르크 족은 북쪽으로는 키예프에 막히고 동쪽으로는 같은 투르크계이지만 훨씬 강한 카를룩에 의해 막혔다. 또 서쪽에는 카스피 해가 있어 이제 그들에게 남겨진 출구는 남쪽 밖에 없었다. 11세기 초 거란족의 공격으로 촉발된 유라시아 초원의 연쇄적 이동의 충격은 오구즈 투르크인에게까지 미쳐 이들로 하여금 트란스옥사니아에서 남쪽 즉 이란 지역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당시 오구즈 연합은 야브구의 칭호를 가진 사람이 통치하였는데 20여 부족들로 이루어진 오구즈 연합의 결속력은 느슨한 편이었다. 셀주크 왕조의 조상인 셀주크 벡은 이러한 야브구 산하에 있던 군사령관이었던 사람이다. (벡은 그러한 사령관의 직책명이다) 그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야브구와 사이가 나빠져 시르다리야 강변의 젠드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셀주크는 985년경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네 아들들 이름은 이상하게도 미하일, 이스라엘, 모세, 요나 등으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대인 이름이다. 이는 셀주크가 이끌던 집단이 그 인근의 카자르 제국을 통해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가 야브구 군대의 장교가 아니라 카자르 군대의 장교였다는 주장도 있다.

셀주크 뿐 아니라 그 아들들도 함께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이들은 이제는 이슬람의 전사로서 이슬람의 확대를 위한 싸움에 앞장섰다. 이는 구체적으로 말해 이슬람을 믿지 않는 인근의 주민들에 대한 약탈을 거리낌 없이 자행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약탈을 통해 집단의 부와 힘은 점점 커져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 당시 트란스옥사니아 지역을 두고 이란계의 사만 왕조, 투르크계의 가즈나 왕조 및 카라한 왕조 등이 서로 경쟁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경쟁을 이용하여 셀주크 집단은 세력을 키워갔다. 셀주크 집단은 가즈나 왕조의 땅을 차지하고 셀주크 제국을 세운 것이다. (1040) 셀주크 제국을 세운 사람은 셀주크 벡의 손자인 토그릴(990-1063)이다. 그는 이슬람 제국의 수도인 바그다드까지 쳐들어가 점령하고(1055) 칼리프를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만들어버렸다. 그리하여 이슬람 제국 군대의 지휘권이 그에게 넘어온 것이다. 이제 투르크의 지배자인 술탄이 이슬람 세계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그 칭호는 술탄이었다. 술탄은 아랍어로서 강자, 권력자를 뜻하는 말인데 이슬람의 영역에 들어온 투르크족 우두머리에게 칼리프가 내려준 칭호였다. 이러한 투르크 술탄국은 셀주크 왕조로부터 오스만 왕조로 이어졌다. 오스만 술탄은 15세기 중엽에는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곧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북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유럽인들에게는 오랫동안 큰 위협이 되었던 이러한 투르크 제국의 뿌리는 몽골초원에서부터 중앙아시아 서쪽 끄트머리인 트란스옥사니아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던 오구즈 투르크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P. Golden, ‘The Karakhanids and early Islam’ in D. Sinor (ed.) The Cambridge History of Early Inner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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