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44회 최초의 북경 대주교 몬테코르비노(1247-1328)

김현일 연구위원

2018.04.27 | 조회 8257

유목민 이야기 제44

최초의 북경 대주교 몬테코르비노(1247-1328)

 

 

몽골 제국과 서방 세계와의 꾸준한 외교적 접촉은 13세기 말 중국 가톨릭 교구의 설립을 낳았다. 교황청이 파견한 이탈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사제인 조반니 다 몬테코르비노가 칸발릭(북경)에 가서 중국 교구를 설립한 것이다. 이는 기독교사와 동서문명교류사의 관점에서 후대의 마테오 리치 신부의 중국선교와 더불어 상당히 의미심장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최초의 북경대주교가 되었던 몬테코르비노는 중국에 파견되기 이전에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의 통합문제를 놓고 비잔틴 황제와 로마 교황 사이의 외교교섭에서 사절 역할을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양교회의 통합은 비잔틴의 미카엘 팔레오구스 황제가 로마교황에 의해 파문되는 것으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몬테코르비노가 비잔틴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로마로 돌아온 것은 1289년이었는데 당시 비잔틴과 접촉하던 몽골 제국 관련 정보를 가져왔다. 몽골 군주들이 기독교에 우호적이라는 점이 그러한 보고 가운데 골자였을 것이다. 당시 교황은 앞서도 언급한 랍반 소마가 알현했던 니콜라스 4세였다. 일칸 아르군은 교황에게 가톨릭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요청에 응하여 교황은 아르군 칸 뿐 아니라 대칸 쿠빌라이 그리고 심지어는 쿠빌라이의 경쟁자였던 차가타이 한국의 카이두와 기독교 군주인 소아르메니아 왕, 그리고 야곱파 교회의 총주교 등에 보내는 외교서한을 작성하여 몬테코르비노를 서한을 전달할 임무를 띤 사절로 파견하였다. 그런데 몬테코르비노는 교황의 서한을 전달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선교사로서 중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중국교구를 개척하였기 때문이다.

몬테코르비노는 일칸이 있던 타브리즈에서 임무를 마친 후 극동으로 향했다. (1291) 그 여정은 그 이전의 사절들처럼 중앙아시아를 거쳐서가 아니라 인도를 거쳐 가는 여정이었다. 즉 타브리즈에서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까지 가서 배를 타고 인도양을 건너 인도로 간 것이다. 그는 인도에서 13개월이나 머물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도 1578년 인도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4년 후인 1582년 중국으로 들어갔는데 몬테코르비노는 그러한 면에서 마테오 리치의 선배였던 셈이다.

함께 동행하였던 동료가 죽자 그를 인도 동남부에 첸나이에 있는 성도마 교회에 묻고 몬테코르비노는 바닷길로 중국으로 갔다. 그런데 그가 북경에 도착하기 직전 쿠빌라이 칸은 죽고 그 손자인 테무르 칸이 대칸의 자리에 올랐다. 새로운 대칸에게 교황의 서한을 전달한 몬테코르비노는 2년간이나 칸발릭(북경)에서 대칸과 함께 머물 수 잇었을 정도로 대칸으로부터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다.

당시 몽골 제국에는 상당한 교세를 가진 네스토리우스파 교회가 있었는데 몬테코르비노는 네스토리우스파가 다른 교파의 교리 전파나 예배당 건립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사제인 몬테코르비노는 이러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당을 건립하고 매일 미사를 올릴 수 있을 정도의 기반을 닦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1299년 칸발릭에 종탑이 있는 교회당을 건립하였다. 1305년 그가 쓴 서신에 따르면 중국에 온 이후 그때까지 6천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네스토리우스파의 방해가 없었더라면 그 수는 3만 명은 적히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몇 년 뒤에는 한 이탈리아 상인의 희사로 왕궁 근처에 교회 부지를 구입하여 새로운 교회당을 지을 수 있었는데 이 새 예배당은 약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한다. (1306년의 2차 서한)

그는 또 150 명의 소년 노예들을 사들여 그들을 가톨릭 신도이자 일꾼으로 만들었다. 몬테코르비노는 이들에게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쳤다. 일종의 신학교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전도하는 데 성공한 인물 가운데에는 상당한 지위의 인사도 있었다. 예전에는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신도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조지 왕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도의 프레스터 요한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아마 케레이트족 왕족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자신의 돈으로 로마교회라는 이름의 또 다른 교회를 다퉁(大同; 산서성에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이렇게 선교활동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대칸의 우호적인 태도와 물질적 지원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대칸은 가톨릭 선교사들에게 알라파라고 하는 은급을 지급하였다. 몬테코르비노가 교회를 세울 때에도 이 돈이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몬테코르비노는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에 도착한 후 몇 년 만에 타타르인들 즉 몽골 말과 글을 완전히 익혔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신약성서와 시편을 번역하였다. 1304년 경 아놀드라는 이름의 독일인 수사가 사역에 합류하기까지 몬테코르비노는 11년간이나 혼자서 그러한 중국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여러 명의 협력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1305년의 그의 첫 번째 서한에서 두세 명이라도 좋으니 모범적인 동역자를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중국으로 오는 가장 좋은 루트까지 제시하였다. 앞에서도 소개한 타나로부터 킵차크 한국을 거쳐 오는 루트로서 이것이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이라고 하였다. 시간은 5-6개월 정도 소요된다고 하였다.

몬테코르비노의 서한을 받은 교황 클레멘트 5세는 7명의 부주교를 임명하여 북경으로 파송하였다. 이들 가운데 세 명만이 무사히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이들의 도착 직후 교황의 명으로 몬테코르비노는 인도를 포함하여 동방을 관장하는 북경 대주교로 서임되었다. 세 사람의 부주교 가운데 한 사람인 페루기아 출신의 안드레아가 1326년에 동료 수사에게 보낸 편지가 하나 남아 있다. 이 편지 역시 몬테코르비노의 서한과 더불어 당시 초기 중국 교구의 사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안드레아는 자이툰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자이툰은 복건성에 있는 항구도시 취안저우(천주泉州)를 말한다. 그는 몬테코르비노와는 사이가 나빴던지 주교로 임명되기 이전부터 취안저우에 와서 정착하였다. 그는 황제로부터 받는 은급으로 시 외곽에 교회를 하나 지었다. 이 교회는 실제로는 안드레아가 자신의 거처처럼 이용하였다. 물론 자이툰 시내에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부유한 여성 신도가 희사한 돈으로 지은 교회당이 있었다. 이 교회가 자이툰의 주교좌 성당이었다.

안드레아 주교의 짧은 편지에서 우리는 당시 몽골 제국의 종교 사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제국에서는 하늘 아래 모든 민족, 모든 다양한 종파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사는 것이 허락된다. 누구나 자신의 종교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전도할 수 있다.” 몽골 제국은 다양한 종교들에 관용정책을 펼쳤으며 이러한 다양한 종교들이 서로 경쟁하고 공존하였다. 당시 하나의 종교만이 허락되던 유럽과는 완전히 딴 세상이었다. 가톨릭 이외의 다른 종교와 이단들을 일절 용납하지 않던 유럽의 가톨릭교회가 이 먼 몽골 제국 내에서 주교구를 설치하고 자유스럽게 포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커다란 아이러니였다.

몬테코르비노 대주교는 1328년에 소천하였는데 그의 소천 소식은 몇 년 뒤인 1333년 교황청에 알려졌다. 교황청은 즉각 그 후임자를 선정하였다. 파리 대학의 신학교수 니콜라스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북경 대주교의 자격으로 21명의 수사 및 6명의 평신도들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알타이 지역의 알말릭에 도착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북경에는 도착하지 못했다. 니콜라스 대주교는 여행 도중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후임 북경 주교가 오지 못했다는 것은 1338년 교황청에 전달된 중국 알란족의 서한에 드러난다. 알란족은 자신들은 몬테코르비노 주교로부터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는데 이제는 자신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이끌어줄 목자가 없다고 하소연한 것이다. 그러자 교황청에서 다시 한번 중국으로 선교단을 파견하였다. 교황 대사 4인을 포함하여 32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대규모 선교단이었는데 이번에는 북경까지 안전하게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 사절단에는 북경 주교로 임명된 사람이 없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이 새로운 사절단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마리뇰리 수사가 있다. 이 사람 역시 신학교수 출신인데 중국에 도착한 후 얼마 있지 않아 돌아간 일부 인사들과는 달리 비교적 오랫동안 체류하였다. 당시 교황청은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에 있었는데 그가 아비뇽으로 귀환하여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133812월 아비뇽을 출발하였다. 콘스탄티노플과 크림반도의 카파를 거쳐 킵차크 한국을 지나는 여정을 선택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한국을 거쳐 북경에 도착한 것은 13425, 6월경이었다. 그는 북경에 약 4년 정도 체류한 후 또 다른 선교중심지인 자이툰으로 가서 그곳에서 인도로 배를 타고 떠났다. 1342년 말이었던 것 같다. 인도 서남부의 퀼론(그는 라틴어로 콜룸붐이라 하였다)으로 가서 일년 정도 그곳 기독교도들 사이에서 체류하였다. 그는 동남부 해안 지역에 위치한 성도마의 유적을 탐방한 후 사바로 갔는데 이는 자바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 실론 섬도 찾아가는 등 몇 년 간을 인도양 주변에서 보낸 것 같다. 실론 섬에서 호르무즈로 배를 타고 와서 육로로 바그다드, 모술, 에데사, 알레포, 다마스쿠스, 갈릴리, 예루살렘을 차례로 방문한 후 아비뇽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가 아비뇽에 돌아온 것은 1353년이라고 하니 무려 15년만의 귀향이었다.

귀향 후 그는 대관식 때문에 이탈리아에 온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로스 4세와 알게 되었다. 호기심이 많은 카를로스 황제는 세계 끝까지 가본 이 남자를 자신의 궁정 사제로 임명하고 그의 모험담을 듣기를 즐겨하였다. 그런데 그가 황제를 수행하여 프라하를 방문했을 때 황제는 마리뇰리에게 보헤미아 연대기개작을 맡겼다. 중세 연대기라는 것은 보통은 아담에서부터 시작해서 당대까지의 역사를 담는데 마리뇰리는 그러한 태고 역사에다가 자신의 동방 여행담과 동방의 지리에 관한 이야기를 잔뜩 끼워 넣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런 요상한 책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저술은 수세기 동안 프라하 수도원 도서관에 처박혀 있다가 1768년 겔라시우스 도브너(Gelasius Dobner)라는 학자에 의해 책으로 간행되었다. 물론 라틴어로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820년에는 마이네르트(G. M. Meinert)라는 체코 학자가 그 연대기 가운데서 마리뇰리의 여행담과 아시아 지리에 관한 부분을 떼어내어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후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필자가 참고한 영국 동양학자 헨리 율의 카타이 가는 길Cathay and the Way Thither 3권에 실린 마리뇰리의 동방기행에 관한 회상은 마이네르트의 그러한 작업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물론 율은 라틴어에서 영어로 직접 번역하였다.

 

참고문헌

 

Henry Yule, Cathay and the Way Thither Vol. III (The Hakluyt Society, 1914)

Peter Jackson, The Mongols and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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