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42회 랍반 소마와 랍반 마르코스

김현일 연구위원

2018.03.16 | 조회 8123

유목민 이야기 42

 

랍반 소마와 랍반 마르코스

 

 

훌레구 칸의 아들 아바카 칸(재위 1265-1282) 때 중국에서 네스토리우스파 수도사 두 사람이 일 한국으로 왔다. 한 사람은 랍반 소마, 다른 한 사람은 랍반 마르코였다. 랍반은 시리아어로 수도사를 뜻하는 말이다. 이들은 모두 기독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로서 랍반 소마는 오늘날의 북경에 해당하는 칸발리크 출신이고 마르코는 내몽골의 코샹 출신이다. 김호동 교수는 코샹이 내몽골의 동승(東勝) 즉 토샹의 오기라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위구르족이었다.

랍반 소마와 마르코는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성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그곳을 통치하던 몽골 왕공들과 많은 사람들이 위험한 여행을 만류하였지만 이들은 고집을 꺾지 않고 카라반을 따라 출발하였다. 1265년의 일이었다. 그 여정은 돈황(당시에는 사저우라고 하였다)으로부터 시작하여 신강지역의 호탄, 카슈가르 그리고 카자흐스탄의 타라스를 거쳐 일 한국의 호라산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다.

호라산 지방을 떠나 바그다드로 가던 중 이란 북부의 마라게에서 우연히 네스토리우스 교회의 총대주교 마르 덴하를 만났다. 마르 덴하는 자신과 같은 교회에 속한 이 두 사람을 환대하고 먼저 이라크와 북부 시리아 일대의 성지들과 수도원들을 돌아보도록 하였다. 그 지역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와 수도원이 상당히 많았는데 이들은 모술 근처의 마르 미카엘 (성미카엘) 수도원이 마음에 들어 그 근처에 살 집을 구하였다.

그런데 마르 덴하는 이들이 수도원에 칩거하기보다는 교회를 위한 활동에 나서달라고 요구하였다. 몽골 말은 물론 몽골인들의 풍속도 잘 알기 때문에 일 한국의 지배층과의 교섭창구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래서 먼저 부탁한 것이 아바카 칸에서 가서 자신의 총대주교 취임을 승인하는 서임장을 받아오라고 부탁하였다.

서임장을 받아온 후 두 수도사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리아를 거쳐 가는 여정은 정세 때문에 안전하지 않아 다시 소아르메니아(오늘날의 터키 남동부 해안 지방)에서 뱃길로 팔레스타인을 가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도적떼들 때문에 길이 막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포기하고 마르 덴하가 있는 바그다드로 돌아갔다. 덴하 총대주교는 이들에게 이제 예루살렘 행은 포기하고 중국으로 돌아가 교회 일을 도우라고 명했다. 그리고 소마를 동방교회의 총순회감독(Visitor General)으로, 또 마르코스는 북중국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마르코에게는 야발라하라는 새로운 이름도 내려주었는데 이는 하느님이 주셨다라는 뜻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야발라하 3세이다) 당시 마르코스는 35, 소마는 그보다 대략 열 살 더 많았는데 두 사람의 뜻밖의 서임은 1280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쿠빌라이와 오고타이의 손자 카이두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 이들은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성 미카엘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다. 1281년 덴하 총대주교가 갑자기 죽었다. 놀랍게도 그 후임으로 마르코스가 선출되었다. 자신은 네스토리우스 교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공식어인 시리아어도 모르고 이방인에 불과하다고 하였지만 네스토리우스 교회 원로들은 당시 세계의 지배자인 몽골의 언어와 관습을 잘 알고 있는 마르코스 주교가 적임자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위구르족 출신인 마르코스가 시리아와 이라크, 이란 그리고 중앙아시아 및 중국에 걸쳐 있던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야발라하는 아바카 칸을 찾아가 서임장을 받은 후 다시 바그다드로 돌아와 공식적인 즉위식을 치렀는데 당시 메소포타미아 일대의 주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마르칸트에서까지 왔다고 한다.

그런데 야발라하의 지위는 그렇게 공고하지는 못했다. 아바카가 죽은 후 벌어진 두 아들들(테구데르와 이복동생 아르군)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지면서 그 여파가 밀어닥친 것이다. 아르군 측을 지지하며 테구데르를 비난하였다는 혐의로 야발라하와 랍반 소마는 테구데르의 궁정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았는데 40일간이나 갇혀 있다가 간신히 무죄가 입증되어 풀려났다. 내전은 1284년 기독교에 우호적이었던 아르군의 승리로 끝나 네스토리우스 교단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야발라하는 아르군과 그 동생 가이하투 칸(재위 1291-1295)의 통치시기에는 면세의 혜택과 교회건립 지원 등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이후에 들어선 칸들은 교회에 우호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이슬람 군주를 자칭하는 칸도 있었다. 교회도 몰수되어 모스크로 바뀐 경우도 있고 무슬림에 의한 기독교도 학살사건도 일어났다. 위협을 느낀 야발라하도 생의 마지막 5년간을 수도원에 숨어 지내야 하였다.

한편 랍반 소마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바꾸기 전인 1294년 바그다드에서 사망하였는데 우리가 그를 주목하는 것은 그가 일 한국의 사절로 유럽을 방문하였기 때문이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맘루크 왕조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서유럽 세력의 도움을 절실히 바랬던 아르군 칸 (재위 1284-1291)이 그를 유럽 파견 사절로 선정하였다. 교황을 포함하여 기독교 왕들에게 보내는 사절로서 기독교도인 랍반 소마가 적당한 인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랍반 소마는 비잔틴 제국과 이탈리아, 프랑스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역사에서 동아시아에서 온 인물이 이렇게 서유럽까지 간 것은 극히 드문 사례였다.

1287년 랍반 소마 사절단은 육로로 흑해 북안으로 가서 그곳에서 선박 편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였다. 당시 비잔틴 제국은 서유럽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터라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비잔틴 황제가 일칸을 도울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소마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여러 교회들과 성소들을 방문한 후 교황을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다. 나폴리에 상륙하여 말을 타고 로마로 향했는데 가는 중 교황 호노리우스 4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교황이 죽었으므로 로마에서는 교황 대신 추기경들과 면담하였는데 추기경들은 네스토리우스파의 교리가 궁금했는지 그에 대한 질문을 주로 하였다. 그러자 랍반 소마는 자신이 온 이유는 종교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라 칸의 사절로서 외교적인 임무를 띠고 왔음을 주지시켰다. 새로운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그는 북쪽으로 여행을 계속하였다.

토스카나 지방과 제노아를 거쳐 프랑스로 들어갔는데 당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십자군 세력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프랑스에서 파견된 기사들이었다. 랍반 소마는 필리프 미남왕(필리프 4)을 알현했는데 왕은 예루살렘의 탈환을 위해 몽골군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였다. 랍반 소마는 한 달 동안 파리에 머물면서 교회와 학교를 구경하였는데 그는 파리에서 3만 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고 하였다. 프랑스 왕은 랍반 소마에게 프랑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획득한 성유물도 보여주었다. 바로 예수가 썼다는 가시면류관과 예수가 못 박혔던 십자가 나무 조각이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의 서남부 지방 즉 가스코뉴 지방은 영국 영토였다. 그곳에 영국 왕 에드워드 1세가 체류하고 있었는데 랍반 소마는 영국 왕을 만나러갔다. 그도 십자군 원정(9차 십자군)에 참여하였던 십자군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문제를 꺼내자 에드워드 1세는 기뻐하면서 자신은 성지 탈환에만 마음을 쓰고 있다고 하였다. 그곳에서 랍반 소마는 영국 왕과 신하들이 참여하는 미사도 주재하였다.

로마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황 니콜라스 4세를 알현하였다. 교황은 랍반 소마가 지난 해 로마에 왔을 때 만났던 추기경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랍반 소마는 교황이 주재하는 미사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동방 교회 방식으로 행하는 미사도 주재하였다. 교황은 약간의 성유물을 선물로 주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예수가 입었던 옷과 성모 마리아가 썼던 머릿수건 조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은 랍반 소마에게 모든 기독교인들에 대한 총순회감독관의 직위를 인정하는 서임장도 주었다. 이는 가톨릭 교황이 서유럽 교회 뿐 아니라 저 먼 동방 교회에 대한 관할권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 한국으로 돌아간 랍반 소마에 대해 아르군 칸은 사절이 큰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하고는 그 성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칸의 천막 앞에 예배당을 세워주고 그에게 이 특별한 교회를 맡겼다. 물론 예배당은 천막으로 된 이동식 교회였다. 칸의 진영이 이동하면 그를 따라 이동하는데 이 교회는 칸의 장막 아주 가까이 세워질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너무나 가까이 있어서 칸의 천막과 교회 천막 줄이 서로 교차할 정도였다고 한다. (랍반 소마의 천막 교회와는 달리 그 몇 년 뒤 야발라하는 마라게에 상당히 멋진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성세례요한 수도원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왕도 더러 찾아오는 유명한 수도원이 되었다)

위구르 족 출신의 마르코스 수도사가 중국에서 순례여행을 와서 총대주교 마르 덴하를 만나 그의 뒤를 이은 총대주교 야발라하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13세기 야곱파 교회(시리아 정교회)의 주교인 바르 헤브라에우스(Bar Hebraeus)가 남긴 연대기에도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코스와 함께 온 동료이자 그의 스승이었던 랍반 소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런데 19세기 말 두 사람의 역사를 담은 시리아어 사본이 발견되었다. 시리아어로 된 사본은 영어와 불어 등으로 번역되어 일반에게 소개되었다. 필자는 월리스 버지(Wallis Budge)가 번역한 1928년판 영역본을 이용하였다. 월리스 버지(1857-1934)는 어릴 때부터 언어에 관심이 많아 12살 때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점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히브리어, 시리아어, 아시리아어 등을 공부한 입지전적인 학자이다. 그의 능력과 열정에 감동한 사람들의 주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하여 훌륭한 오리엔트 전문가가 되었다. 참고로 바르 헤브라에우스가 남긴 방대한 연대기는 원래는 시리아어로 씌어졌는데 현재 시리아어-라틴어 대역본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영어로도 2015년에 Bar Hebraeus the Ecclesiastical Chronicle 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왔다는데 필자는 아직 구경하지 못했다.

 

참고문헌

 

김호동,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까치, 2002)

Wallis Budge, tr. The Monks of Kublai Khan Emperor of China (1928)

Gregorii Barhebraei, Chronicon Ecclesiasticum (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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