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19회 훈족의 후예 오도아케르

김현일 연구위원

2016.08.18 | 조회 12917

■ 유목민 이야기 19

 

훈족의 후예 오도아케르

 

 

서로마 제국은 475년 대장군(마기스터 밀리툼)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를 퇴위시키고 더 이상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지 않음으로써 그 막을 내렸다고 역사가들은 설명한다.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장에서 주역의 역할을 한 이 오도아케르란 인물은 일반적으로 게르만 족 용병대장정도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실은 훈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먼저 당시 만족의 움직임에 대해 자세한 서술을 한 고트족 역사가 요르다네스가 남긴 기록부터 검토해보자. 그의 게티카에는 다음과 같이 오도아케르를 소개하고 있다.

 

라벤나에서 아우구스툴루스(마지막 황제의 별명으로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이다 - 필자)가 그 부친 오레스테스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토르킬링 족의 왕 오도아케르가 스키르 족과 헤룰 족 및 기타 여러 동맹세력들의 우두머리로서 이탈리아를 침공하였다. 그는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그 아들 아우구스툴루스를 제위에서 내쫓아 캄파니아 지방의 루쿨루스 성에 유배시켰다. 그리하여 제1 대 황제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건국 709년째 되던 해부터 다스리기 시작하였던 서로마 제국은 522년 만에 아우구스툴루스와 함께 망하고 말았다. 이후 줄곧 고트족의 왕들이 로마와 이탈리아를 차지하였다. 여러 족속들의 왕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를 정복하고 그 통치 초기에 브라킬라 백을 죽여 로마인들 사이에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그는 왕국을 강화하고 테오도릭의 등장 때까지 근 13년을 다스렸다.” (Getica, 242-243)

 

요르다네스는 그오도아케르를 토르킬링 족의 왕이라고 하는데 토르킬링 족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토르킬링은 투르크를 뜻하는 ‘torc’와 게르만어에서 족속들에게 붙이는 어미 ‘ling’으로 이루어진 말로 여겨진다. 투르크 어를 하는 어떤 부족일 것으로 보이는데 오도아케르의 부친이 아틸라의 측근 에데코라고 한다면 토르킬링은 훈족에 속하는 어떤 부족을 뜻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에데코는 스키르 족의 왕이 되었다. 아틸라의 사후 여러 족속들을 훈족의 왕자들과 지배자들 사이에 분배하면서 그에게는 스키리족 족이 할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스키리 족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도 스키르 족의 왕이 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오도아케르는 훈족의 부친과 게르만 족에 속하는 스키르 족의 모친을 가진 혼혈아였다. 당시 훈족의 고위 인사들이 게르만족 여인과 결혼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이 오도아케르는 470년경 스키르 족과 헤룰 족으로 이루어진 만족 병사들을 이끌고 판노니아로부터 노리쿰(오스트리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들어왔다. 요르다네스는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를 침공했다고 했으나 사실은 당시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리키메르 장군과 황제 안테미우스(재위 467-472)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서 리키메르의 요청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는 오도아케르가 영도하던 만족 부대가 페데라티즉 로마의 동맹군으로 불렸다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로 가서 이탈리아의 왕이 되기 전에는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앞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주교가 쓴 프랑크족의 역사에는 이 오도아케르가 아틸라의 갈리아 원정 이후 갈리아에 남아 프랑크 족의 킬데릭 왕과 동맹을 맺고 갈리아를 침략한 알레만 족을 격퇴하였다고 한다. 당시 그가 지휘한 병력은 작센 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후 오도아케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세베리누스전이라는 성자전에 그가 이탈리아로 가는 도중에 세베리누스 성자를 방문하고 그로부터 이탈리아로 가서 큰 출세를 하리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는 정도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오도아케르가 아틸라 사후 스키르 족이 있던 판노니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스키르 족 왕인 부친을 도왔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요르다네스에 의하면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로 오기 전 스키르 족과 동고트 족 사이에 큰 싸움이 있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수에비 족과 고트 족 사이의 갈등이었다. 수에비 족은 스키르 족, 게피다이 족, 사르마티아 족, 루기 족 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469년 볼리아 전투라는 이름의 큰 싸움에서 스키르 족을 비롯한 반고트 족 진영은 크게 패했다고 요르다네스는 말한다. 오도아케르도 스키르 족, 루기 족, 헤룰 족 등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동고트족과 싸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탈리아로 이끌고 간 게르만 족 페데라티 부대는 이러한 족속들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가 이탈리아로 게르만 족 병사들을 이끌고 온 지 몇 년 되지 않아 아틸라의 비서 출신인 대장군 오레스테스가 네포스 황제를 내쫓고 자기 어린 아들 로물루스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그런데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권력기반이었던 게르만 족 용병들이 정착지를 요구하자 그 요구를 거절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의 동로마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게르만 족 병사들은 이탈리아 땅의 1/3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 전쟁사5.1.5) 요구를 거절하는 오레스테스를 죽이고 그 아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끌고 간 페데라티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권력을 잡은 오도아케르는 형식적으로는 동로마 제국 황제의 대리인(총독)으로서 통치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는 동로마의 제논 황제로부터 임명된 대장군 직을 내세우고 또 황제가 부여한 파트리키우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는 이탈리아를 지배한 최초의 만족 출신 이탈리아 왕이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오도아케르는 훈 제국의 붕괴 이후 훈족의 후예들 가운데 가장 성공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탈리아 왕 오도아케르는 기존의 질서와의 타협 속에서 온건하게 통치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지주들의 재산을 일방적으로 빼앗지 않았다. 원로원도 유지하고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콘술을 비롯한 관직자들을 뽑아 권력에 동참시켰다. 물론 게르만 병사들의 유지비용을 로마인들이 부담해야 했던 것은 사실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오레스테스가 권력을 잃은 것도 정착할 땅과 돈을 요구하는 게르만 페데라티의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 귀족들을 설득하여 그들로부터 땅의 일부 (1/3 이라고 한다)를 받아내어 게르만 병사들에게 주었다. 그의 온건하고 타협적인 통치에 대해 이탈리아의 귀족들은 만족스럽게 생각하였다. 그 치세 13년간 그의 통치 체제에 대해 심각한 반대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인들이 보기에는 이단에 불과했던 아리안주의를 신봉했지만 가톨릭 교회도 그의 치세에 대해 큰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도 온건한 정책을 펼쳤던 것이 틀림없다. 오도아케르의 온건함과 현명함은 어린 황제 로물루스를 죽이지 않고 풍족한 연금을 주고 지방으로 유폐시켰던 데서도 잘 드러난다.

지혜롭고 신통력 있는 것으로 소문난 성세베리누스는 자신을 찾아온 청년 오도아케르의 인물됨을 단번에 알아보았던 것 같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는 오도아케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탈리아로 가거라. 너는 지금은 초라한 가죽 옷을 걸치고 있지만 곧 많은 사람들에게 귀한 선물들을 주게 될 것이다.” (성세비리누스전ch. 7)

이탈리아로 간 오도아케르가 권력을 잡은 후 평판이 높아지고 영향력이 커져가자 동로마 황제 제논은 그를 점점 더 위험한 경쟁자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동고트족 왕 테오도릭에게 고트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가서 오도아케르가 통치하고 있는 이탈리아를 정복하라고 부추겼다. 두 만족 지도자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벌어진 테오도릭과 오도아케르의 싸움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아 3년만에 라벤나 주교의 중재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이탈리아를 통치하기로 하였으나 테오도릭은 그 약속을 배반하고 오도아케르를 연회에 초대한 후 살해하였다. 그날 그 부하들도 발견되는 즉시 살해되었다. 오도아케르의 부인과 형 후노울프도 마찬가지로 살해되었다.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오도아케르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눠주었던 땅은 모두 고트족의 차지가 되었다고 한다. (5.1.28)

 

 

참고문헌

 

Jordanes, Getica.

Eugippius, The Life of St. Severinus (tr. by G. Robinson, Harvard University Press, 1914)

Prokopius, The War of Justinian.

Hyun Jin Kim, The Huns, Rome and the Birth of Eur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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