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12회 훈족이 무찌른 서로마 제국의 적들

김현일 연구위원

2016.06.10 | 조회 10537

■유목민 이야기 12회

 

 훈족이 무찌른 서로마 제국의 적들

 

   

433년 아에티우스는 다시 한번 훈족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왔다. 그러자 세바스티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로 달아났는데 이는 훈족 부대가 서로마 제국 내부의 권력 투쟁의 결과를 결정지을 정도로 중요한 변수가 되었음을 나타내준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군사력을 토대로 이탈리아의 중앙군 사령관(magister militum praesentalis)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는 454년 죽기 전까지 서로마 제국을 움직이는 실세였다. 그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훈족 군대를 동원하여 서로마 제국을 위협하는 적들을 하나씩 무찔렀다. 이렇게 아에티우스가 동원한 훈족 동맹군이 무찌른 서로마 제국의 적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아에티우스 시대에 첫 번째로 훈족의 공격을 받은 것은 부르군드족이었다. 당시 부르군드족은 보름스를 수도로 라인 강 중부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인구가 늘자 영토를 획득하기 위해 로마 제국의 상부 벨기카 주를 침략하였다. (435) 아에티우스의 지원 요청을 받은 훈족의 루아 왕은 부르군드족을 공격하여 이들을 거의 궤멸시켰다. 2만 명의 부르군드 족이 죽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부르군드 족의 왕 군다하르가 끼어 있었다. 훈족에게 당한 이 패배로 보름스 인근의 부르군드 왕국은 무너졌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로마제국의 배려로 먼 사보이 지방에 정착하였다. 유명한 중세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는 바로 이 부르군드족과 훈족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니벨룽겐은 바로 이 부르군드의 왕가 이름이다.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부르군드족의 공주 크림힐트와 훈족의 왕 에첼이 부부가 되었다. 이 부부가 베푸는 축제에 초대받아 부르군드족 왕자들과 그 수하의 기사들 및 일반 병사들이 다뉴브 강을 건너 헝가리 땅에 있는 훈족의 수도로 갔다. 훈족을 방문한 그 부르군드인들의 수가 1만이 넘었다. 연회에서 일어난 우연한 싸움 때문에 훈족 전사들에 의해 그들은 거의 모두 살해된다. 이러한 니벨룽겐의 전설은 훈족에 의해 나라가 없어진 부르군드족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다.

서로마의 동맹군 훈족이 무찌른 또 하나의 적은 서고트족이다. 서고트족은 알라릭 왕의 사후 몇 년 지나지 않아 발리아 왕 때 서로마 제국의 호노리우스 황제와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418) 이 협정에서 서로마 제국은 서고트족에게 정착지를 제공하였는데 바로 현재의 프랑스 서남부에 위치한 툴루즈 시를 중심으로 한 아퀴타니아 지방이었다. 서고트족은 알라릭이 납치해갔던 왕녀 갈라 플라키디아도 돌려보내주었다. 그녀는 예전의 왕 아타울프와 강제로 결혼하였지만 낳은 아기도 죽고 남편도 죽은 바람에 자식도 남편도 없는 과부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이용가치가 없어진 플라키디아를 서고트족은 흔쾌히 돌려보냈다. 서고트족은 로마의 동맹이 되었지만 영역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420년대 중반에 아를르를 공격한 것이나 430년대 중반 부르군드족과 서로마가 싸우는 것을 틈타서나르본을 공격한 것은 그러한 의도에서 일어난 것이다. 아에티우스는 나르본에 대한 서고트의 공격을 역시 훈족의 도움을 받아 격퇴하였다. (437) 당시 서로마 측의 지휘관은 리토리우스 장군이었는데 그는 서고트족의 강화요구를 거절하고 훈족 군대를 이끌고 서고트족의 수도인 툴루즈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에서 그는 그만 서고트족의 포로로 잡혀 죽임을 당했는데 훈족의 피해도 컸다. 그러나 곧 아에티우스가 나서서 힘이 빠진 서고트족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서고트족의 발호를 잠재울 수 있었다.

세 번째 서로마의 적은 바가우데(Bagaudae)’ 반도들이었다. ‘바가우데는 켈트어로 무리를 뜻하는 바가드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 하는데 이들은 갈리아 서북부 지역을 휩쓴 반도들로서 도망노예, 도망병사, 빈농 등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갈리아 민중의 일종의 민중반란이자 반로마 독립투쟁이었는데 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특히 제국의 지주계급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비적떼에 지나지 않았다. 바가우데 반란은 3세기 말부터 시작되어 5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이들이 단순한 강도떼였다면 그렇게 오랫동안 활동이 지속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바가우데의 마지막 두목인 유독시우스라는 인물은 의사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바가우데 반도들이 약탈을 일삼는 단순한 비적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바가우데 반란은 로마 제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갈리아 하층민중의 무장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좌우간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아에티우스의 입장에서는 제국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바가우데에 대한 소탕작전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여기에도 훈족을 투입하였다. 서고트족과의 전투를 지휘했던 리토리우스는 나브본 공방전에 투입되기 전에 훈족 군대를 이끌고 바가우데 반도들을 소탕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래서 티바토라는 대두목과 그 외 몇 명의 소두목들이 체포되어 대부분이 목이 달아났다. (티바토는 탈출에 성공하여 다시 한번 봉기를 일으켰다고 한다. E. A. Thompson, 139)

그런데 하나 재미난 것은 이후에 일어난 새로운 봉기의 지도자 역할을 하였던 유독시우스가 봉기가 진압되자 훈족에게로 피신하였다는 사실이다. (448) 당시 훈족의 왕은 아틸라였는데 아틸라가 유독시우스를 받아들인 데에는 정치적인 고려가 깔려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는 서로마 제국의 실력자 아에티우스와 훈족의 유일한 왕 아틸라 사이에 금이 가고 있음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아에티우스는 훈족의 왕인 아틸라에게 선물을 보내고 심지어는 아틸라에게 라틴어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도와줄 있는 비서도 두 번이나 보내주었지만 아틸라는 서로마의 단순한 동맹(페데라티)을 벗어나 그의 왕국을 로마 제국을 압도하는 세력으로 만들려는 야심이 있었다. 아틸라는 서로마 제국과만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도 상대하였는데 이를 살펴보면 그가 전유럽적인 차원의 전략과 목표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훈족이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살펴보기 전에 사료에 등장하는 훈족 왕들에 대해 살펴보고 그들의 통치방식을 탐구해보기로 한다.

 

참고서적

 

E. A. Thompson, The Huns (Blackwell, 1996)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117개(10/12페이지)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