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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

김현일

2011.11.15 | 조회 13763

고대 로마의 태양신 숭배와 기독교


김현일 / 증산도상생문화연구소


태양신 ‘솔 인빅투스’
오늘날 우리들은 7요일을 한 주週로 하는 리듬에 맞추어 산다. 원래는 6일은 일하고 한 주의 마지막 날인 제7일은 쉬는 날로 한 것인데 최근에는 쉬는 날이 2일로 늘었다. 전반적인 생산력이 늘어 2일을 쉬어도 사회가 돌아가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일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언제부터 인간들이 이렇게 한 주란 것을 설정해놓고 생활해 왔을까? 이 문제를 탐구한 역사가들에 의하면 현재와 같은 7요일의 기원은 먼 고대 바빌로니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하늘의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별들 가운데 특히 일곱개의 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오늘날 우리가 요일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태양,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그리고 토성이다. 이 일곱 행성들은 각각의 신에 의해 지배를받는다. 바빌로니아 인들의 이러한 신념은 주변의 페르샤인들과 이집트인들 그리고 또 히브리인들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구약성서의 맨앞에 나오는 <창세기>에는 신이 6일 동안 계속해서 창조의 일을 하고 일곱째 날은 안식하였다고 한다. 전지전능하여 세상을 창조한 신도 인간처럼 주말을 쉬어야 하는지는 몰라도 이 기사는 안식일을 삶에서 꼭 필요한 신성한 날로 여긴 유태인들의 관념을 잘 전해준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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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을 지배하는 신들에게도 등급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 일요일을 지배하는 신 즉 태양신이 으뜸이다. 만물에게 온기와 생명 그리고 빛을 주는 것이 태양임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전혀 놀라운 것이 못된다. 태양이 없으면 지구의 생명도 조만간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태양신은 오랫동안 신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태양신을 숭배하는 민족들은 바빌로니아 인들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탄생한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로마 제국도 한동안 태양신을 으뜸 신으로 숭배하였다. 유피테르(영어로는 주피터, 그리스어로는 제우스) 신을 주신으로 한 12신을 섬겼다는 것은 들어보았지만 태양신을 숭배하였다는 이야기는 아마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다.

로마가 지중해를 에워싼 많은 지역들을 점령하여 지배하다보니 자연히 다양한 종교들이 유입되었다.특히 유력하였던 것이 동방(오리엔트)에서 들어온 종교들이었다.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이집트의 이시스 숭배, 페르샤에서 유입된 미트라 숭배와 마니교, 시리아의 태양신 숭배 등이 그런 종교들이었다. 이 가운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이 태양신교이다. 물론 태양신은 고대 그리스에도 있었고 로마에도 있었다. 그리스의 헬리오스 신이 그런 신이다.
헬리오스 신은 후대에는 광명의 신인 아폴론 신과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원래는 별개의 신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그리스 세계에서는 헬리오스 신이 주신에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주신은 유피테르였다. 로마의 전통적인 태양신을 로마 인들은 ‘토착 태양신’이라는 뜻으로 ‘솔 인디게스’라고 하였는데 로마시 몇 군데에 그 사당이 있었다.

1세기에 살았던 역사가 타키투스에 의하면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대경주장(키르쿠스 막시무스)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한다. 퀴리날 언덕에도 사당이 있었다. 또 로마의 제례력에 따르면 태양신의 제전은 12월 11일, 태양신과 달신의 제전이 8월 28일에 각각 열렸다는 것으로 보아 토착 태양신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의 토착 태양신과 동방으로부터 도입된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솔 인빅투스’는 ‘정복되지 않는 태양’이라는 뜻이다. 솔 인빅투스가 로마 제국 후기에 중요한 숭배대상이었던 것은 이 시기에 주조된 많은 주화에서 생생히 드러나고 있다. 실제로 3세기 이후 여러 명의 로마 황제들이 태양신 숭배를 천명하였으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엘라가발루스는 태양신교의 사제로서 태양신을 로마의 주신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여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황제이면서 태양신 사제였던 소년
A.D. 218년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마크리누스 황제를 죽이고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는 일이 벌어졌다. 원래 로마의 황제는 로마의 인민을 대변한다고 자부하는 원로원이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정치가 혼란해지면서 군대가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인물(보통은 자신들의 사령관)을 황제로 옹립하는 일이 예전에도 여러 번 일어나 이제는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것은 이번에 새로 옹립된 황제는 열네 살짜리 소년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같으면 중학교 3학년 학생이 거대한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제위에 올랐던 것이다. 시리아에 주둔하던 제3 군단이 세운 소년 황제의 이름은 엘라가발루스로서 시리아의 유명한 사제 가문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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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시리아에서는 아람어로 ‘엘가발’이라고 불린 태양신을 널리 숭배하고 있었는데 에메사 시는 그 중심지였다. 로마 제국의 속주들 가운데 시리아가 로마 제국의 권력중심부에 다가가게 된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재위 193~211) 때부터였다. 세베루스의 황후 율리아 돔나는 시리아 왕족의 후예로 에메사의 엘가발 신의 대사제직을 맡고 있던 사람의 딸이었다. 상당한 지성을 갖춘 돔나가 왕궁의 안주인이 되면서 시리아인들이 원로원을 비롯한 고위 직책에 대거 진출하였던 것이다. 위에서 말한 엘라가발루스도 돔나 황후의 언니인 율리아 마에사의 손자였다. 엘라가발루스가 제위에 추대된 것은 세베루스 황제와의 이러한 인척관계 때문이었다.

소년 황제 엘라가발루스는 4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다가 다시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엘라가발루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후에도 통치보다는 태양신 사제 역할에 집착하였다. 제위에 등극하기 위해 로마 시로 올 때에는 에메사의 태양신 신전에서 검은 돌을 모시고 와서 로마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 돌은 그리스, 로마식으로 신의 모습이 새겨진 조각상이 아니라 그냥 돌덩어리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이었다는데 이를 시리아 인들은 신이 깃든 신체神體로 숭배하였던 것이다. 이 신체를 안치하기 위해 황제는 로마의 팔라틴 언덕 위해 신전을 건립하였을뿐 아니라 태양신 엘가발을 로마의 전통적인 주신인 유피테르 위에 두려고 하였다. 위로부터 일종의 종교 쿠데타가 감행된 것이다.

소년 황제는 로마인들을 계속해서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베스타 신전의 처녀와 결혼을 하였던 것이다. 원래 베스타 신전을 지키는 처녀들은 30년 동안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사제가 되는 것인데 황제는 그 가운데 한 처녀를 취함으로써 로마의 신성한 전통을 짓밟아 버렸다. 또 엘라가발루스는 남성신인 태양신을 아스타롯 여신과 결혼을 시켰다. 아스타롯 여신은 구약성경에도 많이 등장하는 페니키아 인들의 여신이다. 북아프리카(오늘날의 튀니지)에 정착한 페니키아 인들이 카르타고를 세웠는데 그들의 신을 그대로 가져갔음은 물론이다. 카르타고의 이 아스타롯 여신을 로마인들은 미네르바 여신과 같은 신으로 여겼다. 이 여신의 신상을 바다 건너서 모시고 와서 엘가발 신과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이 신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축제가 황제의 명으로 성대히 베풀어졌다.

그런데 엘라가발루스는 성적으로도 매우 방종하였다. 여러 여성과 결혼하였다가 이혼하였으며 심지어는 측근의 남자들과 동성애 관계를 갖고 심지어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인 히에로클레스라는 노예를 자기 남편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성적 정체성이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역사가들이 그를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소년 황제의 괴기한 행각을 지켜보던 로마의 근위대 병사들은 마침내 더이상 황제의 기행을 용납하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황제와 그 모후는 근위대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사촌인 알렉산더 세베루스가 같은 근위대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태양신을 국교로 :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새로운 황제가 들어선 후 태양신의 신체는 다시 시리아로 돌려보내졌다. 엘라가발루스의 기행이 로마 엘리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이후에도 로마 제국에서 태양신 숭배가 쇠퇴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양신 숭배는 민중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어갔다. 엘라가발루스 황제가 죽임을 당한 지 반세기 후 로마를 통치하였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엘라가발루스와는 달리 뛰어난 통치능력을 보여준 황제였다. 어처구니없는 소문 때문에 군인들에 의해 살해되기는 하였지만 갈리아와 동방에서 일어난 분리독립의 움직임을 제압하고 로마의 정치적 통일을 회복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황제는 태양신 숭배를 아예 국교로 삼으려고 하였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제국의 통합을 위해서는 종교적인 통일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던 무적의 태양신을 로마 제국의 최고신으로 삼아 분열로 치닫고 있는 로마의 통합을 유지하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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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태양신 숭배를 정착시키기 위해 태양신 사제의 지위를 높였다. 예전에 태양신의 사제는 ‘사케르도스’-현재 로마 가톨릭에서 신부를 지칭하는 용어이다--라고 하여 로마의 하층민들이 그 직책을 맡았지만 이제 태양신 사제는 국가의 공식적인 신관이 되었다. 로마에는 오랜 옛날부터 국가 공식 신들의 제사를 관장하는 다양한 신관들이 있었는데, 그 신관을 ‘폰티펙스’라고 하였다. 로마 황제는 이러한 신관 가운데 가장 높은 최고신관(폰티펙스 막시무스)이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또 태양신을 위한 제전도 개최하였다. 마치 그리스의 올림픽경기가 올림포스 신들에게 바쳐진 제전인 것처럼 태양신을 위한 제전이 4년마다 개최되도록 하였다. 태양신은 한마디로 말해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로마 제국의 주신이자 수호신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정책에 대해 반발은 없었다. 이는 태양신교를 국가의 으뜸 종교로 만들기는 하였지만 전통적인 다른 종교를 탄압한다든가 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말마따나 황제가 본격적인 종교적 통합을 추진할 시간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황제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분리해 나간 동방의 팔미라 제국과 서방의 갈리아 제국의 분립 움직임을 진압한 후 페르시아를 정벌하기 위해 아시아로 향하던 중 트라키아에서 근위대 장교 몇 사람에 의해 살해되었기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의 타협책
14107_p196_img03다양한 종교를 신봉하는 많은 민족들로 이루어진 로마 제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시도하였던 것처럼 종교적인 통합이 필요하였을까? 원래 로마인들은 다른 민족들의 종교에 대해 매우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로마인들의 원래 종교가 유피테르 신을 위시한 다양한 신들로 이루어진 다신교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하나의 신에 의해 창조되고 그의 뜻으로 움직여 나간다는 일신교와는 성격이 전혀 달았다. 일신교도들은 모든 민족이나 족속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진정한 신을 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다른 종교들은 모두 잘못된 가르침 즉 우상숭배에 불과하다는 전제를 깔고있다. 그래서 유일신을 숭배하는 종교는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 되고 적대적이 되는 것이다. 물론 다신교를 숭배하는 로마가 외래 종교를 박해한 경우가 없지 않다. 외래 종교가 로마의 전통적인 국가종교를 부정하고 또 로마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경우 박해가 가해졌다.

기독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기독교는 로마의 전통종교를 우상숭배라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로마의 국가도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기독교도들의 유일신 신앙보다는 그들의 공동체관 즉 국가관을 문제로 삼았다. 예수가 설파한 ‘신의 나라’만 인정하고 현실의 로마 제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라는 가르침으로 세속 권력을 인정하라고 가르쳤으나 후대의 기독교도들은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로마 제국에 대해 반란을 획책한 것은 아니나 공직이나 병역을 거부하는 식으로 국가에 대해 소극적인 저항 뿐 아니라 로마인들이 일반적으로 따르는 로마의 전통적 종교예식도 따르지 않았다. 이러한 기독교도들이 국가의 통합에 대단히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황제들이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기독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네로 황제 때부터 간간히 있어왔지만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탄압은 마지막 탄압으로서 대단히 엄격하고 철저한 탄압이었다. 황제는 칙령으로 교회건물을 파괴하고 신도들의 모임을 엄금하였다. 또 성서와 예배에서 사용되는 십자가상과 예수의 도상 등은 모두 소각하고 기독교도들을 모두 공직에서 추방한다는 내용이었다. 칙령에 부수된 훈령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독교도들에게 로마의 전통 신들에게 예물을 바치게 하고 이를 거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거나 강제 노역에 처하도록 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령에 반발하여 기독교도들의 폭동이 몇 군데서 일어났으나 모두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탄압은 기독교 사가들에 의해 ‘대박해’로 불리지만 실제로 처형당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많은 기독교도들이 일시적으로나마 신앙을 버려 박해를 피하는 선택을 하였다. 그래서 결국 기독교를 근절하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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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불안의 시대이자 위기의 시대였던 3세기에 큰 성공을 거뒀다. 로마의 전통적인 다신숭배가 줄 수 없는 영혼의 구원을 내세운 기독교는 불안하고 희망을 찾기 힘든 로마인들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로마 황제들이 일시적으로 탄압한다고 해서 기독교의 확산을 막기는 힘들었다. 더욱이 교회는 내세에서의 영생을 가르쳤기 때문에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로마 제국이 박해를 포기한 이유는 박해가 큰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년 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함께 박해를 주도하였던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 황제는 311년 박해령이 실패하였음을 자인하고 기독교도들에 대한 이전의 박해정책을 취소하였다.(1)*

(1)* 당시에는 정제와 부제가 있었다. 정제正帝를 ‘아우구스투스’, 그보다 하위 파트너인 부제副帝를 ‘카이사르’라고 불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동서로 나눠 두 명의 정제가 각기 동서 로마를 다스리고 정제는 다시 각각 그 밑에 부제를 두어 영역을 나누어 통치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네 명의 통치자가 로마 제국을 분할해서 통치하는 통치제도가 출현하였는데 이를 ‘테트라르키’라고 부른다. 그런데 네 사람이 사이가 좋고 서로 손발이 잘 맞는 경우에는 이 분할통치가 효과를 발휘하였으나 서로 대립하는 경우 제국은 여러 경쟁자들 간의 내전으로 빠져들게 된다. 실제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일어난 일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차례로 여러 경쟁 황제들을 물리치고 일인통치를 달성한 사람이다.

그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공동명의로 내린 313년의 밀라노 칙령은 대기독교 정책을 박해로부터 공인으로 180도 전환한 혁명적 칙령이었다. 역사를 바꾼 이 칙령에는 다음과 같은 그 의도가 설명되어 있다.

“오늘부터 기독교든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각자 원하는 종교를 믿고 그에 수반되는 제의에 참여할 자유를 완전히 인정받는다. 그것이 어떤 신이든 그 지고의 존재가 은혜와 자애로써 제국에 사는 모든 사람을 화해와 융화로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기독교에게 인정된 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는 다른 신을 믿는 자에게도 똑같이 인정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제국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고, 어떤 신이나 종교도 그 명예와 존엄성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칙령이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였음을 잘 드러내준다. 밀라노 칙령은 제국의 평화적 통치를 위한 종교적 자유의 선언이었다. 물론 아직은 기독교와 로마의 다른 전통 종교들은 동등하게 대접받았다. 서방의 정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후에 친기독교적인 정책을 취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것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려고 하는 후대의 움직임과는 달랐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과 제국의 통치를 분점하고 있는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의 눈치를 봐야 할 뿐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죽기 전까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로마의 전통적인 신들에 대한 제례를 관장하는 최고사제인 폰티펙스 막시무스직도 버리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태양신 숭배를 위한 조처도 취했다.
321년의 칙령에서는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태양신의 날을 존중할 것을 명했다. 일요일을 지정해서 이 날은 재판도 하지 않고 관공서를 열지 않으니 도시의 다른 직업종사자들도 일을 하지 말고 공식적으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2)*

(2)* 물론 농민은 예외였다. 날씨의 영향을 받는 농사일의 특성 때문에 예외로 하였던 것이다. 태양신의 날(디에스 솔리스)은 바로 우리가 일요일(Sunday)이라고 부르며 매우 좋아하는 날이다. 기독교 교회도 명백히 이교적인 기원이 있는 이 태양신의 날을 집회일로 삼았다. 그리하여 후일이 날은 ‘주의 날’(디에스 도미니쿠스)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의 모습이 들어간 화폐에도 태양신 즉 ‘솔 인빅투스’의 모습을 넣었다. ‘SOLI INVICTO COMITI(정복되지 않는 태양신에게)’ 라는 명문銘文은 그의 시대에 주조된 많은 주화에서 보이는데 황제는 태양신을 자신을 도와주는 동료로 여겼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여러 증거들로 볼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인정해주었지만 기독교와 태양신 숭배 사이의 화합과 타협을 추진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양쪽에 모두 우호적인 제스처를 썼다. 기독교 교회에 대해서는 박해기에 몰수하였던 교회재산을 돌려주고 또 교회 건물도 지어주었다.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와 로마의 구베드로 성당은 그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면세의 특권을 준 것도 그였다. 그러나 신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후 이곳에 이교신전을 건립한 것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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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황제가 기독교 내부의 교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25년 니케아에서 공회의를 소집하고 그 회의를 몸소 주재한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회의는 삼위일체설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비현실적 교리를 정통교리로 선언한 회의였다. 황제는 대다수 주교의 생각을 좇아 삼위일체설을 정통으로 선언하고 선언서에 서명을 거부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세 사람의 주교를 먼 곳으로 추방해버렸다. 황제가 이렇게 교회내부의 문제에 과도하게 개입한 것은 그가 기독교도로서 교회의 교리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삼위일체설 문제로 가두에서 난투극이 벌어질 정도로 교회 내부의 분쟁이 심각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세력이 상당히 커진 한 종교의 심각한 내부분쟁을 황제가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이 여러 종교의 평화적인 공존을 통해 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려 하였던 것이 황제의 소망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을 것이다.

기독교의 승리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기만 하더라도 기독교와 태양신 숭배는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사후 (337년) 권력을 잡은 아들들은 이교 신전을 폐쇄하고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기독교 성직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공적인 의무를 면제해 주는 등 친기독교적인 정책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 황제(재위 355~363)가 등극하면서 다시 로마의 종교정책은 반기독교적으로 바뀌었다. 그리스 철학 특히 신플라톤주의에 큰 감명을 받았던 율리아누스는 그리스 로마의 지적인 전통과 종교적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선제들이 교회에 부여한 특권을 몰수하고 폐쇄되었던 이교신전을 복구하였다. 그는 법 앞에 모든 종교가 평등하다는 엄숙한 선언을 하여 기독교로 경도된 제국의 정체성을 되찾고 그 위에서 황제권력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러나 율리아누스 사후 시계추는 다시 반대방향으로 향했다. 여러 황제들에 의해 친기독교적 정책이 취해지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었다(392년). 그는 로마의 전통적인 종교를 ‘불법 종교’로 선포하고 그 신전들을 파괴하였다. 이 기독교 황제의 치세에 니케아 교리를 제외한 어떠한 교리해석도 모두 이단으로 선언되고 탄압을 받았다. 예전에 이교신앙을 옹호하던 황제들이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자유’와 ‘종교의 평등’을 내건 것과는 달리 이제는 기독교 정통에서 약간이라도 벗어나는 일체의 신앙과 사상 그리고 문화는 모조리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집안 내에서도 이교신앙 의식을 금지한 것, 오랫동안 내려오던 그리스의 올림피아 제전(올림픽 경기)을 폐지한 것도 바로 이 기독교 황제에 의해서였다. 다른 신앙과 신들, 다른 종교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였던 그리스 로마의 지적 전통은 이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이교 신앙에 대한 기독교도 대중의 폭력 사태가 빈발하였다. 모두 국가의 방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통치에서 종교적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사라진 중세 암흑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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