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찾기

다시 동이를 말한다(3) 동방문화의 주체 - 동이

김선주 연구위원

2016.09.28 | 조회 2087

■다시 동이를 말한다(3)

 

 동방문화의 주체 - 동이

 

 

2. 동이의 의미 변화

동이의 의미가 변화된 과정을 살펴보기 전에 우선 동이, 동이족의 명칭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자.

동이족이라는 명칭에는 크게 세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중국 한족에 대한 상대적 개념의 동방 이민족의 명칭이다.

여기에서의 동이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중국의 동부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등지와 만주 및 한반도에 퍼져 살던 족속으로 중국인들의 조상인 화하족(華夏族=漢族)과는 다른 이민족을 지칭하는 말이다.

둘째, 동쪽 오랑캐를 지칭한다. 화하족과는 다른 이민족인 동이는 화하족 우위의 중화사상이 자리잡으면서 동이족은 '동쪽 오랑캐'란 뜻으로 비하되었다. 나라 때의 중국인은 변방의 종족을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불렀는데, 동이족은 바로 변방의 오랑캐중 동쪽의 종족을 지칭하는 것이다.

세째, 동이족은 또한 동방의 조선족, 동북아 유목민을 의미하기도 한다.

진나라 통일 이후에는 산둥반도의 일부가 중국 역사에 흡수됨으로써, 만주와 한반도에 분포한 한, 예맥 등을 동이로 지칭하였다. 즉 동이족의 범위가 상당히 동쪽으로 축소 이동한 것이다. 당나라 이후 동북아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민족을 흔히 동이라고 하였다.

상대 갑골문에 보면 이족을 지칭하는 의 명칭이 자주 보인다. 이족에 대한 명칭의 사용 빈도를 살펴보면 이 제일 많고 이 그 다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상서에 보면 사이四夷’, 사예四裔등의 용어가 자주 나타나고 있는데 이같은 사실은 주변 이민족들로부터 오랫동안 시달려 온 화하족이 ’· ‘등과 같이 멸시, 무시하는 비칭을 부여하여 사용하여 왔고 또 춘추전국시대에 이적의 거주지 방향에 따라 불렀던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등의 사이四夷의 개념도 이미 서주시대부터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우리 역사상에 동이라는 표현이 우리 민족에 대한 표현으로 수용된 것은 조선시기에 이르러서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동이의 의미와 내용은 중국인의 관점에서 중화에 대비되는 오랑캐나 주변국에 대한 폄칭적 표현과 함께 우리 민족에 대한 통칭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실학자들에 의해서 동이는 더 이상 폄칭이나 주변부적 존재에 대한 표현이기보다는 화하에 대응하는 동등개념으로 인식하는 상황이 정립되게 되었다. 한치윤은 동이성격을 중국적 화이관이 아닌 독자문화 중심 측면에서 논의를 전개했다. 안정복은 동이 전체가 바로 우리 민족을 의미하는 표현이라는 인식은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며 동이일부가 우리 민족과 관계가 있고 그 중심무대가 요동지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정약용은 동이로 포괄되는 존재가 단순히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비여진과 함께 우리 민족을 광의의 동이개념속에 포괄하여 설명하고 있다.

실학자들은 산동지역 동이와 요동지역 동이를 함께 망라한 후한서동이전 서의 내용체계를 수용한 한치윤의 견해를 바탕으로 동이인식의 시공간적 폭을 확대했다. 또한 동이의 중심거점이 요동지역이었으며 단군으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이 이들 동이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같은 인식은 이후 민족주의 사학 및 재야사학으로 연계되어 산동동이와 요동동이 즉, 전국 이전 동이와 한대 이후 동이를 동일한 존재로 파악하여 그 외연과 상한을 확대 파악하는 양상으로 정형화되었다.

 

문명이 시작되는 동쪽의 큰 활을 쓰는 어진 사람을 의미하는 동이는 후대 중국 동쪽 변방의 오랑캐로 그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동이가 어떻게 해서 변방의 오랑캐로 폄하되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동이라는 말 속에 포함된 의미는 역사적인 측면과 정치적인 측면이 맞물리면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나게 됐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춘추春秋를 쓰면서 이를 융, 등과 함께 오랑캐의 뜻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 배경으로 화하족과 동이족의 정치적 대결을 들 수 있다.

이른바 화하족이라 부르는 중국 한족의 조상들은 밖으로는 북쪽의 흉노의 위협을 받아왔고, 안으로는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조건의 동쪽 황하 유역에 자리 잡고 있던 동이족과 삶의 터전을 놓고 쟁탈전을 벌여왔다.

이 쟁탈전의 출발점은 중국 사람들이 그들의 시조로 삼아 온 황제헌원과 치우천황과의 싸움으로 시작된다.

 

이에 대해 사마천의 사기1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농씨의 나라가 쇠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툴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사납게 짓밟았으나 신농씨는 이를 휘어 잡지 못하였다. 이때 헌원이 무력으로 제후를 치니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가 가장 사나워 칠 수가 없었다. 헌원은 판천阪泉 들에서 염제와 세 번 싸운 후에야 이길 수 있었다. 이 때 치우가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키므로 헌원은 여러 제후들을 불러모아 탁록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이고 제후들이 헌원을 높이므로 신농씨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다.”

 

그러나 환단고기』「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에는 다르게 쓰고 있다.

 

복희가 다스리던 나라를 신농이 다스려 왔는데 유망(楡罔: 신농의 6세손)에 이르러 정치를 어지럽게 하여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많아 백성들이 흩어지는 등 혼란하였다. 이 때 서쪽에 있던 헌원이 서쪽 토착민의 우두머리가 되어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치우도 유망을 토벌하여 서쪽 땅을 안정시키기로 하였다.

치우는 군대를 이끌고 유망을 토벌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여 양수洋水를 거쳐 유망이 도읍하고 있는 공상(空桑: 현 중국 하남성 진류陳留)으로 물밀 듯 쳐들어갔다. 이 때 유망은 소호小昊를 시켜 항전하였으나 치우는 예과와 옹호극을 휘두르며 크게 싸워 이기니 소호는 항복하고, 유망은 도망하였다.

공상전투에서 승리한 치우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천하가 태평하게 하기를 맹세하고 다시 군사를 진격 시켜 탁록으로 향하였다. 이 때 헌원은 치우가 공상에 입성하여 새로운 정치를 편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천자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탁록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려 하였다.

치우는 공상전투에서 항복한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포위하고 쳐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헌원은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이에 치우는 친히 전쟁에 나서기로 하고 구군九軍에 동원령을 내렸다. 구군 중 8군은 2군씩 나누어 4방향으로 포위, 진격하게 하고 천왕은 나머지 1(보병과 기병 3)을 직접 거느리고 헌원의 진 중앙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치우 군대는 헌원을 향하여 사방에서 조여 들어 갔으나 굴복하지 않자 크게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이에 적군은 두려움에 떨며 목숨을 걸고 도망치니 백리 사이에 병마를 볼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탁록에는 성을 쌓고, 회대에는 집을 짓자 헌원의 족속들이 모두 신하라 하며 공물을 바쳤다.

치우가 군대의 진용을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 지 10년 동안 헌원과 싸운 것이 73회나 되었다. 그런데도 장수들은 피로한 기색이 없고 군사들은 뒤로 물러설 줄을 몰랐다.

그러나 헌원이 여러 차례 싸워 치우에게 패하고도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치우를 본받아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감히 백번이고 싸움을 걸어왔다.

치우가 불같이 노하여 장수들에게 크게 싸워 위력을 보이도록 하였다. 치우의 군사는 헌원이 다시는 싸울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한 판 큰 싸움을 벌려 한 개의 진을 완전히 초토화 하였다. 이 때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 무기로 진을 이루고 진격하니 헌원의 군대는 끝내 저항하지 못하였다. 이 후에야 싸움이 그쳤다.”

 

여기서 황제헌원과 그 족속(화하족)은 치우천황과 그 족속(동이족)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물론 그 후손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치우와 동이족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품고 2300여년을 흘러 진시황까지 내려오게 된다.

화하족은 2300여년 동안 황하 중, 상류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진시황에 이르러 강력한 힘을 길러 동진을 거듭하여 중국대륙 전체를 그들 하화족의 확실한 터전으로 만드는 전국 통일을 달성하고, 동이족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거나 동화시켜 통일제국을 이룬 것이다.

화하족은 동이를 대인으로 우러러보면서도 계속되는 정복정치에 시달려 나중에는 동이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자연히 동이족에 대한 적개심이 쌓여 동이東夷의 뜻을 오랑캐로 바꾸어 해석하게 됐던 것이다.

특히 한무제 때 사마천이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기를 저술하면서 동이족 역사의 뿌리부터 왜곡하였다. 동이는 크게 시대에서 춘추전국시대까지 다양한 명칭으로 산동 등 중국의 동부지역에 존재한 동이와 진한 통일 이후 요동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한 동이로 구분할 수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서문에서 상주와 춘추전국시대의 동이와 한나라 이후 사서에 등장한 동이를 구분하지 않고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종래 동이의 범위와 개념에 더욱 혼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한나라 이후 쓰여진 사서에 나오는 동이는 전국시대까지 중국의 동부지방에서 활약한 동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존재였다. 진나라 이후 만주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조선족과 숙신과 동호의 후신은 물론 일본, 유구 등지에 살던 족속들을 동쪽 오랑캐란 뜻으로 비하한 말이다. 이는 화하족 우위의 사상(中華思想)에 의거한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과 같은 맥락으로 동이라 하였기 때문에 겨레의 갈래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동이족 역사는 그 뿌리부터 왜곡되었다.

중국은 사마천의 탁록대전 왜곡부터 기자조선 역사 왜곡, 지금의 동북공정까지 한민족 고대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음모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사마천은 탁록 대전의 역사를 날조하고 치우천황의 존재를 왜곡하여 동북아 역사와 문명의 뿌리를 황제 헌원으로 조작하였으며, 중국이 천자국으로서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사관을 만들어 내었다.

역사 왜곡의 완결판은 동북공정이다. 2002년 중국정부가 발표한 동북공정은 중국이 고대부터 동아문명의 중심이었다는 역사관을 이론적 배경으로 깔고 있다. 이는 옛 고조선, 고구려, 대진국의 영토였던 만주와 한반도 북녘 땅까지도 중국의 역사강역, 고유영토로 만들겠다는 흉계이다. 결국 동북공정은 한민족 고대사 전체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음모로서 단순한 과거사 차원의 문제를 넘어 우리의 미래까지 위협하는 끔직한 역사 찬탈인 것이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시기의 요하문명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역사학계는 요하문명도 중국 문명의 일부이고 황하문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요하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치우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국의 조상이라며 중화삼조당을 지었다.

그러나 요하 상류에서 발굴되는 청동기는 황하가 아닌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다. 고인돌의 분포 역시 그곳에서 시작돼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음을 보이고 있다. 요하문명의 주력은 만주와 한반도로 전파된 것이다.

한민족은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시대가 지난 후 열국시대 이래 중국 한족(漢族)과 일본의 상고(상고) 역사의 왜곡으로 민족사의 뿌리가 단절되어 그 상처가 심히 깊더니” (도전1:1:7)

오늘날 한민족은 뿌리 역사를 잃고 심지어 그 실체를 부정하기까지 하고 있다.

 

朝鮮國 上計神 中計神 下計神無依無托하니 不可不 文字戒於人이니라

조선국 상계신(환인) 중계신(환웅) 하계신(단군)이 몸 붙여 의탁할 곳이 없나니 환부역조하지 말고 잘 받들 것을 글로써 너희들에게 경계하지 않을 수 없노라.(도전5:347:16)

 

환국, 배달, 조선의 개국시조인 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적 실존이 부정되고, 시원 역사를 부정하기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중국의 역사학계는 심지어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측의 고구려가 자국의 역사라는 근거를 크게 4가지로 요약해 볼수 있다.

첫째, 고구려는 현재의 중국 영토에 건국되었고, 또 현재 중국 영토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중국 영토에서 멸망했기 때문에 중국 역사라고 주장한다.

둘째, 왕씨의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고구려는 중국역대 왕조에 조공을 바쳤다.” 즉 중국에 조공을 바쳤기에 그리고 중국에 책봉을 받았기에, 고구려를 중국의 일게 지방 정권 이라고 주장한다.

넷째, 한반도의 북부 만주지역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측의 역사왜곡에 대해서 그들이 내세우는 근거가 틀리다는 소극적인 주장이 나오기는 하지만 더욱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된다.

 

천지의 가을대개벽기에 역사의 근본 뿌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중화주의 사관과 식민사관에 의해 철저히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 한민족의 국통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잃어버린 뿌리역사를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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