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4회 지리학자 스트라본이 본 스키타이족

김현일

2016.04.01 | 조회 12093

유목민 이야기 4회

 

지리학자 스트라본이 본 스키타이족





                                                                        ▲스키타이 왕의 영묘


   스트라본(BCE 64-CE 24)은 고대 서양의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가로서 17권으로 된 지리서 《게오그라피아》를 남겨놓았다. 그는 지중해 주변의 많은 지역들을 몸소 답사하고 또 많은 역사서와 지리서들을 읽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 책을 썼다. 그의 책은 유럽과 아프리카, 서아시아, 인도 등 당시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을 다루고 있는데 고대 세계에 대한 엄청나게 귀중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 지리학 제7권 중에는 스키타이에 관한 기록이 들어 있다.

   스트라본의 시대에 스키타이인들의 영역은 헤로도토스 시대에 비해 크게 줄어 있었다. 스키타이인들은 남부러시아 평원과 우크라이나 일대 --스트라본의 말에 따르면 돈 강에서 드네프르 강 사이의 지역-- 에서 밀려나 크림 반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사우로마타이(사르마트인)였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중요한 족속이 ‘록솔란족’(록솔라노이)라고 불린 사람들이었다. 록솔란족은 후일 훈족 시대(CE 4,5세기)에 등장하는 알란족과 연관되어 있다. 어원으로 볼 때 ‘록솔란’은 ‘로스’와 ‘알란’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주민의 교체가 있기는 했지만 스키티아 지역은 여전히 예전처럼 유목민들과 일부 정착 농경민들(게오르고이)로 이루어져 있었다. 스트라본은 스키타이의 유목민들에 대해 우호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그는 ‘말젖을 먹고 수레 위의 집에서 사는’ 유목민들이 부의 축적에 오염되지 않고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지만 결코 타민족의 지배하에 노예처럼 사는 것을 거부하는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칭찬하고 있다. 스키타이 유목민들의 의로움은 정착 농민들에게 받는 적당한 액수의 공납에서도 드러난다. 물론 공납을 거부할 때에는 유목민들의 응징을 각오해야 했지만 말이다. 스트라본이 본 스키타이 유목민들은 우리가 앞에서 본 BCE 7세기 경의 킴메르족이나 스키타이 조상들과는 달리 약탈보다는 공납수취로 살아가는 족속이었다. 자신들의 땅을 경작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경작을 허용하고 대신에 공납을 받는 것이다. 스트라본은 오히려 약탈 같은 불의한 행동은 정착 농경민들이 저지른다고 말하고 있다. 농경민들은 유목민들에 비해 문명화되어 있고 유순하다고 일컬어지지만 대신에 금전적 이익에 탐닉한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바다로 나가 해적질과 노략질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뉴브 강에서부터 돈 강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다스렸던 스키타이 제국은 BCE 3세기 초부터 동서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동쪽에서는 앞에서 말한 록살란족을 포함한 사우로마타이족, 서쪽에서는 트라키아인들과 게르만족, 켈트족의 침략이 있었다. 스키타이인들이 크림반도로 내려온 것은 이러한 침략자들 특히 아시아 쪽에서 이주해온 사우로마타이족에 밀려났기 때문이다. 스트라본은 스킬루로스 왕이 크림반도에 스키타이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스키타이인들이 차지한 크림반도 일대와 지협 너머 드네프르 강까지의 영역을 합쳐서 ‘소스키티아’라고 부른다고 스트라본은 적고 있다. 

   소스키티아라는 지역은 또 하나 있다. 댜뉴브 강 하류의 지역으로 현재 이름으로는 도브루쟈 지방이다. 이곳이 소스키티아라는 이름을 띠게 된 것도 스키타이인들이 크림반도에서 그곳으로 대거 이동하여 정착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인들이 크림반도로 내려갔을 때 그곳은 무주공산이 아니었다. 케르손네소스(현재의 케르치) 같은 그리스인들이 세운 도시들과 마에오티스 호수(아조프 해) 입구 양안에 자리 잡은 보스포로스 왕국 같은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도시들과 보스포로스 왕국에 대한 스키타이인들의 압박은 갈수록 커져갔다. 스트라본은 그들이 요구하는 공납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크림반도의 그리스인들이 의지하게 된 것이 바다 건너 폰투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왕이었다. 로마사 책을 좀 읽어본 사람은 이 미트라테스라는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스 세력은 이미 쇠퇴해 있었고 로마는 내부 문제로 싸우느라 이곳에는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 틈을 타고 ‘미트리다테스 유파토르’ 즉 미트라테스 6세는 소아시아 전역과 아르메니아 일대를 정복한 후 흑해 북안 초원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흑해를 둘러싼 대제국을 건설하려고 한 것이다. 그들의 자유를 앗아갈지도 모를 외국 군주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크림반도 그리스 도시들의 갑갑한 처지였다. 스키타이인들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문화 애호가로 알려져 있는 미트리다테스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미트리다테스는 그리스인들의 원조요청을 구실로 크림 반도로 진출하여 스키타이 왕국을 정복하였다. 그리하여 스킬루로스가 세운 소스키타이 왕국은 그의 아들 대에 무너지고 말았다. 미트리다테스 왕은 그리스인들을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옛 페르시아 제국의 부활을 내세우며 이란계 족속들을 끌어들여 로마와 대결하였다. 그는 사우로마타이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에게 패했던 스키타이인들까지 반로마 진영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는 로마와의 세 번째 전쟁에서 패하자 크림반도로 달아났다. 그는 여기서 재기를 모색하였으나 그리스인들의 배반으로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일세를 풍미하였던 미트리다테스 왕은 자결로 생을 마감하였다. 로마가 스키타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달은 것은 바로 이 미트리다테스 전쟁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이자면 소스키타이 왕국의 수도가 네아폴리스인데 그리스말로 신도시라는 뜻이다. 현재의 심페르폴 교외에 위치한 이곳에는 석조건물 형식의 영묘가 서 있다. 스킬루로스 왕의 영묘로 추정되는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서적

 

Strabo, tr. by H. Hamilton et W. Falconer, Geography (Bohn’s Classical Library, 1854)

M. Rostovtzeff, Iranians and Greeks in South Russia (Oxford Clarendon Press, 1922)


글쓴이 : 김현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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