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18회 아틸라의 아들들

김현일 연구위원

2016.07.27 | 조회 11470

■유목민 이야기 18회  

 

아틸라의 아들들

  

 

스키티아와 게르마니아의 지배자아틸라가 어이없게도 결혼식 당일 과음으로 기도가 막혀 죽었다는 것이 프리스쿠스의 단편에 나오는 아틸라의 죽음에 대한 설명이다. 독살설도 있다. 아틸라가 죽은 그날 밤 함께 있었던 새로운 신부 일디코가 의심을 받았던 것은 물론이지만 6세기의 연대기 작가 요하네스 말라라스에 의하면 서로마 제국의 실권자 아에티우스가 아틸라의 경호원을 매수하여 아틸라를 살해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틸라가 급사하는 바람에 훈 제국에는 누가 아틸라의 권력을 계승할 것인가 하는 권력계승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장자가 아버지의 권력을 그대로 계승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아틸라 사후 아틸라 아들들 사이에서 심각한 내분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인이 몇 명이나 되었던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틸라는 여러 명의 부인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로마 제국의 프리스쿠스 사절을 접대하였던 헤레카는 정실부인이었을 것이다. 요르다네스는 아틸라가 욕심 때문에 많은 여자를 거느려 그 아들들이 한 족속을 이룰 정도로 많았다고 하는데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의문이다. 프리스쿠스에 의하면 아틸라는 예상 외로 소박한 사람이었다. 외교사절들을 위해 베푼 연회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금이나 은으로 된 잔을 사용했지만 그의 잔은 나무로 만들어진 잔이었다. 아틸라는 여자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소박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훈 제국의 통치를 이어받았던 아들은 세 명이다.

장자는 엘락이었다. 아틸라는 흑해 북안에 살던 아카치르(Akatzir) 족이 내분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개입하여 아카치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그때 아틸라는 엘락 왕자를 파견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이 아카치르 족이 훈족에 속한 사람들이었는지 아니면 훈족과는 별개의 투르크 부족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갈린다. 아카치르 족의 왕 엘락은 아틸라 사후인 454네다오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네다오 전투는 훈 제국의 붕괴의 신호탄이 된 것으로 역사가들에게 알려져 있다. 요르다네스에 의하면 훈족 왕자들 간에 피지배 족속들(gentes)을 분배하는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자 게피다이 족이 훈족이 자신들을 노예처럼 대한다고 분노하면서 봉기하였다고 한다. 게피다이 족의 봉기는 다른 족속들의 연쇄적 반란으로 이어졌다. 전투에서 패한 훈족은 판노니아를 버리고 다뉴브 강 하류 지역으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네다오 전투로 훈 제국이 끝난 것은 아니다. 동쪽으로 물러갔던 훈족은 다시 판노니아를 탈환하려고 하였다. 형 엘락이 죽은 후 훈족의 왕이 된 아틸라의 차남 덴기직이 그러한 시도를 하였다. 요르다네스의 기록에 의하면 덴기직은 두 차례나 판노니아의 고트족과 전쟁을 하였다. 첫 번째 전쟁은 454년에 있었다. “고트족을 도망노예로 간주하여그들을 되찾고자 한 것이다. 당시 고트족은 아말 가문의 세 형제가 판노니아 지역을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 발라메르를 훈족은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성공하지 못한 덴기직은 다시 동쪽으로 달아났는데 이번에는 다뉴브 강 연안을 벗어나 흑해 연안의 드네프르 강 지역까지 후퇴하였다. 덴기직은 그로부터 약 10년 뒤 그의 휘하에 남아 있는 소수의 세력 울친주르, 안기스키르, 비투구르, 바르도르 족 -- 을 동원하여 판노니아의 고트족을 공격하였다. 이 부족들은 훈족에 속한 족속들로 생각된다. 그러나 덴기직의 두 번째 판노니아 공격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덴기직은 그 직후 동생 에르낙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에 사절을 보내 다뉴브 강 주변에 예전처럼 로마인들과 훈족이 상호간에 필요한 물건들을 교역할 있는 시장을 개설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동로마의 레오 황제는 과거에 훈족이 많은 피해를 끼쳤다는 것을 이유로 훈족과의 교역을 거부하였다. 곡물이나 기타 생필품을 직접 생산하지 못하는 유목민에게 정착 농경 사회와의 교역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거부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아틸라의 두 아들은 의견이 갈렸다. 덴기직은 동로마를 상대로 싸움을 하자는 입장이었고 에르낙은 그에 반대하였다. 덴기직은 동생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얼어붙은 다뉴브 강을 건너 동로마 제국으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트라키아에서 일어난 전투에서 덴기직은 패했다. 동로마의 장군 아나가스테스는 포로로 잡은 덴기직의 목을 잘라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469년의 일이었다.

형과는 달리 세력을 보존하는 전략을 택한 3남 에르낙은 자신을 따르는 훈족 집단을 이끌고 소스키티아(Scythia Minor) 즉 오늘날의 도브루자 지역에 정착하였다. 스티클러에 의하면 다뉴브 하류 남쪽의 도브루자는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되는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속하는 곳으로 기후나 식생 면에서 훈족이 살던 곳과 가장 유사한 곳이었다. (Stickler, 104) 그는 이처럼 동로마 제국의 변경 지역에서 동로마와의 충돌을 피하면서 세력을 키워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에르낙으로부터 후일 불가리아를 세운 왕조가 나왔다.

동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한 덴기직 휘하의 훈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헝가리 역사가 시노르는 그들이 소집단으로 나뉘어져 한편으로는 약탈행각을 하며 또 경우에 따라서는 로마의 장군들에 의해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Sinor, 199) 당대의 시인 시도니우스가 남긴 황제찬가라는 시에는 서로마의 마요리아누스 황제(재위 457-461)가 곡창지대인 북아프리카를 반달족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불러 모은 여러 만족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 가운데 훈족 집단도 있었다. 그 우두머리는 툴딜라라는 사람이었는데 툴딜라 휘하의 훈족은 네다오 전투 이후 모에시아 수페리오르(오늘날의 세르비아 지역), 다키아 리펜시스(오늘날의 불가리아) 지역에 자리 잡았는데 서로마 제국의 요청으로 용병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

요르다네스가 그의 책에서 언급한 사크라몬티시’, ‘포사티시로 불린 사람들의 경우는 툴딜라 집단과는 달리 수비병으로 땅을 받고 로마에 정착한 집단으로 보인다. (요르다네스, 266) 로마에 정착한 훈족 가운데서 동로마 제국의 군문에 들어가 높은 지위까지 올라간 인물들도 더러 눈에 띈다. 프리스쿠스의 단편에 기록되어 있는 켈칼(Chechal)은 동로마의 고트족 출신의 장군 아스파르 밑에서 참모 노릇을 한 사람인데 그는 자신이 훈족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의 문도(Mundo)는 동로마의 최고장군 계급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문도는 아틸라의 후손인데 게피다이 인들을 내쫓고 도처에서 온 많은 범법자, 악당, 도적들을 모아다뉴브 북방의 초원을 떠돌며 약탈행각을 일삼았다고 한다. (요르다네스, 311) 요르다네스가 이렇게 매도한 문도는 요르다네스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동고트족의 테오도릭 왕의 신하가 되었다. 문도는 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밑에서 벨리사리우스 장군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장군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6세기 비잔틴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그는 동로마의 전략적 요충지인 일리리아 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Procopius, 65) 그러나 이처럼 로마 제국 내로 들어가 정착한 사람들은 점차 로마 사회에 동화되어가면서 훈족의 정체성을 서서히 잃어갔을 것이다.

 

참고서적

 

Jordanes, Getica.

Procopius, tr. by H. B. Dewing, The War of Justinian, Hackett Publishing Company, 2014)

D. Sinor, ‘The Hun Period’, in D. Sinor ed. The Cambridge History of Early Inner As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T. Sticker, Die Hunnen, C. H. Beck,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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