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8회 아드리아노플 전투

김현일 연구위원

2016.05.09 | 조회 11483

■유목민 이야기 8회

아드리아노플 전투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역사서의 마지막 장인 제31장은 다음과 같은 음울한 말로 시작된다. “역경과 번영을 끊임없이 갈마들게 하는 운명의 여신이 모는 빠른 수레바퀴는 그 사이에 전쟁의 여신으로 하여금 복수의 여신들을 그 동맹군으로 삼아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하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의 재난은 제국의 동부로 옮겨졌다. 많은 전조와 불길한 조짐들이 의심할 수 없는 징표로써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예시하였다.” 암미아누스는 378년 아드리아노플에서 벌어진 비극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러한 음울한 말로써 그의 책의 마지막 부분을 시작한 것이다.

로마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다뉴브 강을 넘어 로마 제국 내로 들어온 고트족 난민들이 자신들을 받아준 로마 당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군과 싸워 로마군을 궤멸시킨 싸움이다. 이 싸움에 동로마제국의 발렌스 황제도 직접 참전하였는데 그도 살해되고 말았다. 세 대륙에 걸친 대로마 제국이 야만족들이 제국 안으로 몰려든 난민사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죽고 그 최고지휘관인 황제까지도 전사한 것이다. 아드리아노플은 오늘날 불가리아에서 터키 국경을 넘자마자 있는 도시 에르디네에 해당한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그곳에서 북쪽으로 약 1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378년 8월 9일 벌어졌다. 로마의 핵심 군사력 약 15,000 명이 전투에서 사망하고 국경 근처의 여러 무기공장들이 파괴되어 로마제국의 군사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물론 고트족이 이 전투 후 곧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아니다. 발렌스 황제의 뒤를 이어 유능한 테오도시우스 장군이 한가한 삶을 누리고 있던 스페인으로부터 급히 불려와 제국을 위기로부터 건져내는 소방수의 역할을 맡게 되어 사태는 진정국면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가 고트족을 완전히 군사적으로 진압한 것은 아니다. 382년 그는 고트족과 동맹을 체결하고 그들을 동맹자(foederati, 페데라티)로 삼았다. 382년의 이 조약은 향후 로마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로마가 군사력으로 제압하지 못한 만족을 정착할 땅이나 돈을 주고 동맹으로 만들고 로마에 군사적 도움을 주도록 하는 조약이었던 것이다. 이는 로마가 만족을 힘으로 압도하지 못하고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 제국의 힘이 그 절정을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명백히 드러내주는 것이었다. 강력한 군사적 세력인 훈족과도 로마는 이러한 성격의 조약을 맺었던 것을 물론이다.

이러한 동맹조약이 로마제국의 군사적 취약함을 반영한 것임은 그 후의 사태들에서도 명백해졌다. 고트족은 테오도시우스 황제로부터 제권을 찬탈하려고 하던 에우게니우스와의 싸움에도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도와 싸웠다. 즉 로마의 내전에도 개입하였던 것이다. 고트족의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우두머리인 알라릭 왕은 고트족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이 자신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었다. 알라릭의 고트족 무리는 로마의 동맹자에서 적으로 돌변하였다. 그리스로 내려간 알라릭의 고트족은 그리스 전역을 약탈하고 다니다가 결국 로마 황제로부터 그가 원하던 것 하나를 얻었다. 로마 제국의 방위에서 중요한 지방인 일리리아 속주를 방어하는 ‘일리리아 속주 대장군’의 직책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고트족은 이로써 만족하지 않았다. 요르다네스의 말에 따르면 고트족은 “다른 사람들의 지배 하에서 평온한 예속의 삶을 살기보다는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왕국을 세우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알라릭 휘하의 고트족은 그래서 제국의 중심부인 이탈리아로 들어가 로마 시를 포위하고 약탈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다시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로 들어가 그들이 원하던 나라를 세웠다. 바로 갈리아 서남부의 서고트 왕국이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는 로마의 쇠퇴를 알리는 전투였을 뿐 아니라 서로마를 멸망으로 이끈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싸움이었다. 봉기를 일으킨 고트족은 다뉴브 강 너머 흑해 북안에 살다가 훈족의 공격을 받아 안전한 곳을 찾아 로마 국경으로 쇄도했던 것인데 물론 국경인 다뉴브 강 북안에 서서 로마 당국으로부터 입국을 애청하였다. 오늘날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민사태와 유사한 난민사태가 당시에도 벌어진 것이다. 오늘날 유럽국가들은 인도적으로 난민을 대접하지만 당시의 로마의 장군들은 이들 고트족 난민을 무척 비인간적으로 대접하였다고 한다. 고트족이 봉기를 일으킨 것이 이 때문이었다.

아드리아노플 전투의 주역은 고트족이기는 하였지만 그 배후에는 아시아에서 온 훈족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있었다는 것을 여기서 필자는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싶다. 당시 기독교권의 주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그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사태의 본질을 궤뚫는 의미심장한 서술을 남겼다. “훈족이 알란족을 엄습하고 알란족은 고트족을 엄습하였다. 고트족은 다시 타이팔리족과 사르마타이족을 엄습하였다. 자신들의 나라로부터 쫓겨난 고트족은 우리를 일리리쿰의 망명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사태는 이로써 끝난 것은 아니다.”

참고서적 : Otto J. Maenchen-Helfen, The World of the Huns : Studies in Their History and Cultur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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