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유목민 이야기 20회 쿠트리구르와 우티구르 훈족

김현일 연구위원

2016.08.30 | 조회 11131

■유목민 이야기 20회

 

 

 쿠트리구르와 우티구르 훈족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비잔틴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과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 북아프리카의 반달 족과 전쟁을 벌였다. 그 시대를 살았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가 남긴 유스티니아누스 전쟁사1,200 쪽에 달하는 여덟 권으로 된 사서이다. 이 책의 주제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치른 세 차례의 전쟁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는 비잔틴 제국과 관계를 맺은 여러 종족들과 그 지리적 사정에 대한 풍부한 서술이 담겨 있다.

551년 즈음에 완성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사서에는 훈족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다. 훈 제국은 453년 아틸라의 사후 급속히 붕괴되었으며 그 후 훈족은 소규모 집단으로 나뉘어져 일부는 다뉴브 강 주변에 정착하고 일부는 흑해 북안 지역을 무대로 하여 유목민 집단으로서의 삶을 영위해갔다는 것이 많은 역사가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훈족은 6세기 중반에는 강력한 두 집단으로 뭉쳤던 것으로 보인다.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에 등장하는 쿠트리구르’(Kutrigur)우티구르’(Utigurs)라는 이름의 훈 부족집단이 그것이다. 프로코피우스는 두 집단의 이름이 훈 족 왕의 두 아들 이름에서 온 것이라 한다.(Prokopius, 8:5:2) 우리는 두 집단의 왕들이 아틸라 가문의 후예일 것으로 보지만 정확한 관계는 알 수 없다.

프로코피우스 당시 우티구르 훈족은 비잔틴 제국과 멀리 떨어진 마에오티스 호(아조프 해) 동쪽과 타나이스 강(돈 강) 주변에 자리 잡고 있었고 쿠트리구르 훈족은 비잔틴 국경과 인접한 흑해 북안에 살고 있었다. 이 두 집단은 같은 훈족에 속했지만 비잔틴 제국과는 전혀 다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티구르는 비잔틴 제국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평화스런 관계를 유지하였던 반면 쿠트리구르 훈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로마 영토를 약탈하는 일이 잦았다.

프로코피우스의 유스티니아누스 전쟁사2권에 기록되어 있는 비잔틴 제국에 대한 대규모 침공은 쿠트리구르 훈족의 것이었다. 540년경의 이 공격에서 훈족은 아드리아 해로부터 콘스탄티노플까지 발칸 반도를 체계적으로 약탈하였다. 일리리아 지방에서는 32 개의 요새를 함락하고 무려 12만 명의 포로를 잡아갔다. 그들은 그 이후에도 장성을 넘어 케르손네소스 반도를 침공하고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에 발을 디뎠을 뿐 아니라 그리스까지도 내려갔다. 아틸라 시대 훈족의 동로마 침략을 연상시키는 공격이었다. 그로부터 20년 뒤에도 대규모 침략이 있었는데 자베르간 왕이 이끄는 쿠트리구르 군대는 콘스탄티노플의 방어를 위한 외성인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장성)을 넘어 콘스탄티노플의 내성인 테오도시우스 성벽 앞까지 도달하였다. 군마 7천이 동원된 이 쿠트리구르의 공격으로 콘스탄티노플은 함락의 위기에 처했으나 벨리사리우스 장군의 기지로 위험을 모면하였다. 테오파네스의 연대기에 의하면 벨리사리우스는 황제의 말과 수도원 말을 포함하여 시내의 모든 말들을 동원하여 병력의 수가 엄청난 것처럼 연출하는 기만전술로써 훈족을 퇴각하게 만들었다. (The Chronicle of Theophanes Confessor, pp.341-342)

쿠트리구르의 공격규모를 볼 때 당시 다뉴브 강 너머의 훈족 집단은 결코 소규모 집단이 아니었다. 비잔틴 제국에 심각한 위협이 될 정도로 쿠트리구르 훈족은 강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고심 끝에 비잔틴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우티구르 훈족으로 하여금 쿠트리구르와 싸우게 만드는 전략을 썼다. 이러한 외교적 책략으로 우티구르는 주변의 테트라키테스 인들(크림 반도에 살던 고트족)과 동맹을 맺고 쿠트리구르 훈족을 공격하였다. 동족상잔의 이 전투는 치열한 양상으로 상당 기간 계속되었다. 우티구르가 승리하였는데 그 결과 쿠트리구르에게 잡혀서 노예생활을 하던 수만 명의 로마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쿠트리구르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그 조건이 매우 쿠트리구르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쿠트리구르 인들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돈을 받고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가며 더 이상 로마인을 노예로 삼지 않고 로마인을 친구로 대할 것을 약속하였다. 또 만일 쿠트리구르가 자신들의 거주지에서 떠나야할 부득이한 사정이 생기면 트라키아 지방에 황제가 정착지를 제공한다는 약속도 부가되었다. 실제로 우티구르 훈족과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쿠트리구르 훈족 2천 명 가량이 트라키아 땅에 정착하였다. (Prokopius, 8:18)

그러자 우티구르 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우티구르 훈족의 왕 산딜(역사가에 따라서는 산딜크라고도 기록하고 있다)은 사절을 보내 로마 황제에게 항의하였다. 로마를 침탈했던 적들은 로마의 호의를 입고 있는데 정작 목숨을 걸고 로마인들을 위해 싸운 자신들에게는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불평의 소리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를 많은 감언과 선물로 무마하였다.

그 후 동유럽에는 아시아에서 온 새로운 유목민 아바르 족이 쇄도하였다. 피터 골든 교수는 아바르 족이 콘스탄티노플 당국과 접촉한 시기를 557년 혹은 558년으로 보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세(527-565) 때였다. (Golden, p.260) 아바르는 흑해 북부와 다뉴브 하류를 거쳐 567년에는 예전에 훈족의 본영이 있던 판노니아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사비르, 알란, 오노구르, 우티구르, 쿠트리구르를 차례로 정복하였다고 한다. 아마 우티구르와 쿠트리구르의 골육상쟁이 두 부족의 힘을 약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아바르 족의 정복으로 훈의 두 부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는 아바르 족이 서유럽 원정시 쿠트리구르 훈족을 동맹으로 이용하였으며 이 때 쿠트리구르는 1만 명의 병력으로 판노니아를 너머 남쪽의 달마치아를 공격하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History of Menander the Guardman, p.137) 당시 아바르 족은 랑고바르드 족도 동맹으로 삼았는데 이들은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하여 그곳을 정복하였는데 포 강 유역의 이름이 롬바르디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바르 제국 시기에 쿠트리구르, 우티구르 훈족은 아바르의 지배 하에서 그 동맹부족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대불가리아의 건국 시조인 쿠브라트가 쿠트리구르 출신으로서 아바르 족과 싸워 독립을 쟁취했다는 사실은 쿠트리구르가 비록 아바르의 지배하에 있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그 독립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참고문헌

 

Prokopius, The War of Justinian.

P. Golden, ‘The Peoples of the south Russian steppe’, The Cambridge History of Early Inner Asia, p.260.

C. Mango et R. Scott, The Chronicle of Theophanes Confessor: Byzantine and Near Eastern History, AD 284-813 (Clarendon Press, 1997)

R. C. Blockley, The History of Menander the Guardman (Francis Cairns,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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