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와 세계문화

어두운 과거사를 지닌 모범적 경제대국, 독일

이영

2013.07.04 | 조회 8451


독일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양면적인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 나라가 있을 까? 독일은 한편으로는 괴테, 쉴러, 헤세, 모차르트, 베토벤, 칸트, 헤겔, 니체 등 문 인, 음악가, 철학자로 유명한 세계문화의 산실로 인정되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다른 한편 나치시대, 유대인 학살, 전범국가 등 특히 이웃나라 국민들에게 끔찍하 게 각인된 부정적 측면으로 기억되는 나라이다. 최근에 와서 동서분단국이란 특수 성이 재통일 사건으로 봉합되고 유럽통합의 지도국이자 경제대국의 명성을 갖추 고 있지만 과거역사의 그림자는 아직도 네오나치의 세력화, 재통일 후의 정치지형 의 변화 등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1. 독일의 역사

게르만족, 게르만어
독일은 게르만족에서 시작되었다 한 다. ‘독일적인 것’의 영어식 표현인 ‘져 먼german’과 동일한 ‘게르만’하면 우리 는 역사 속에서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연결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우 선 떠올린다. 중앙아시아의 훈Hun족으 로부터 내몰리며 보다 좋은 기후와 비 옥한 땅을 찾아서 당시 방위력이 약화 되었던 로마 제국으로 대거 침입한 ‘게 르만족의 이동Volkerwand erung’은 흔히 다 른 시각에서는 ‘야만족의 침입Barbarian Invasions’으로 지칭된다. 팍스 로마나 Pax Romana, 즉 ‘로마에 의한 평화’는 북 방 이민족의 남진으로 말미암아 깨지 게 되었고 당시 ‘고전시대’라 불리던 유 럽은 이를 통해 ‘중세초기’라는 새로운 시대로 편입되었다.

흔히 나치의 선전을 통해 강조되어 인 식되어온 단일민족의 이미지는 사실과 다르다. 독일 민족의 원류인 게르만족 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발트 해 부근 에 살았던 여러 종족의 통칭이다. 이 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인도에서 유럽까지 방대하게 펼쳐져 있는 인도 게르만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 다는 정도이다. 하지만 이 게르만어에 는 노르웨이, 스웨덴어 등이 속한 북 게르만어, 독일어, 영어, 네덜란드어 등 이 속한 서 게르만어, 그리고 지금은 소멸하고 없지만 고트어가 속한 동 게 르만어가 있다. 1522년 인쇄되어 널리 퍼진 루터의 성서번역으로 통일된 근 대 독일어의 발판이 마련되었고 이의 연장선상에 지금 사용되는 현대 독일 어가 있다. 현대에 오면서 ‘게르만족’에 대한 규명이 이루어졌으나 고고학, 역 사연구, 혹은 언어학 등 각 연구영역에 서 지칭하는 대상이 상이하여 일치된 지역이나 민족을 지정하기 어려우나 대체적으로 로마의 시각으로 보여지는 북방 ‘야만족’이나, 켈트 족과 구별되는 중부유럽에 살았던 유목민 정도로 이 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의 독일 지역에 게르만족이라 불리는 민 족 군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독 일 역사와의 연관성을 되짚어볼 수 있 을 것이다.


‘독일 문제 Deutsche Frage’
독일의 역사와 영토에 대해서는 쓸 것이 많다.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이탈리아 북 부, 동유럽지역, 베네룩스 3국 등 현재의 많은 비非독일지역이 독일역사 속에 부분 적으로 편입되어 있었고 근대에 이르기 까지 국경문제를 야기해왔다. 이는 1806 년 신성로마제국이 종언을 고하고 독일 지역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2강 구 도 속에 재편되면서부터 국내외적으로 ‘독일문제’라는 특별개념으로 취급 되어 왔다. 그래서 독일재통일의 순간에도 주 변국들에겐, 여러 번 전쟁을 일으키고 주변국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독 일의 국경문제가 외교적 약속의 가장 중 요한 항목에 속했다. 특히 나치독일의 유 럽침략과 유대인 학살에 대한 악몽은 독 일이 강대국이 되는 것을 항상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고, 독일 내의 정치 지형의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했 다. 통독과 함께 한때 다시 사회문제로 대두된 네오나치세력의 외국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행위는 그 어느 때 보다 세 계 각국의 진지한 관심을 받았다.



독일 역사
독일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10세기 독 일왕조가 생성되기 시작한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프랑크 왕 국의 전통에서 시작된다. 이 왕국을 구성한 민족은 게르만족, 켈트족, 그리 고 로마로부터의 이주민들과 병사들의 후손이었다. 영토확장과 함께 비교적 강력한 왕권을 형성하였던 카롤링거왕 조의 칼Karl(샤를마뉴)대제는 프랑스와 독 일의 공동역사의 위대한 선조로 추앙 받게 된다. 서유럽을 통합하는 이 왕 국은 하지만 843년 베르뎅Verdun조약으 로 서, 중, 동 프랑크왕국으로 분할되 었으며 이는 각각 프랑스, 독일, 이탈 리아의 모체가 된다.

동 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는 카롤링 거 왕조의 붕괴 이후 로마 교황과의 특약에 의해 독일 왕이자 동시에 로마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되면서 독일과 로마 교황청과의 특별한 관계로 이어 지는 ‘신성로마제국’이 확립되게 된다. 하지만 이 제국은 이후 이탈리아에 대 한 과도한 간섭으로 독일지역에 소홀 해지면서 독일 지역은 여러 제후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분할되는 긴 혼란의 시기로 이어지게 된다.

신성로마제국이 1806년 나폴레옹의 점 령에 의해 종언을 고할 때까지 오랫동 안 통일된 제국을 형성하지 못하고 중 소연방으로 분립되어 있던 독일에는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이렇다 할 통 일된 ‘민족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다. 나 치시대를 거치면서 세계인에게 각인 된 ‘독일민족’ 상은 사실상 역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초엽 나폴레옹의 독일 지역 점령과 곧 이어 전개된 ‘해방전쟁 Befreiungskrieg’때부터 시작되어 이후 프 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지역 통합 시도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871년 마침내 프로이센의 비스마르 크와 빌헬름 1세에 의해 오스트리아 를 제외한 독일지역의 통일이 이루어지 면서 지금의 독일이란 나라가 처음으 로 민족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중세와 근세를 아우르는 신성 로마제국의 시기에 독일 지역에선 수 많은 큰 사건이 일어났다. 1517년 마르 틴 루터(1483~1546)의 95개조 반박문에서 촉발된 종교개혁은 전 유럽을 휩쓸고, 독일지역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을 30 년 전쟁(1618~1648)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 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독일지역은 인 구감소와 함께 여러 개의 영방국가(領邦 國家, Territorialstaat: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들)로 나 뉘게 된다. 그와 반대로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에서 볼 수 있듯이 절대왕조 시대가 도래하지만 1789년 프랑스대혁 명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결 국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종언을 고하 게 되는 제국은 이미 더 이상 독일제국 의 이름을 덧붙일 수 없었다. 이미 오 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제국의 마지막 임종을 지킨 셈이었다.

일단 통일국가로 완성된 프로이센 중심 의 독일제국의 빌헬름 2세는 뒤늦은 민 족국가로서의 발전을 한꺼번에 보상하 려는 듯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세계정 책을 추진함으로써 국제적 긴장을 초 래한다. 이후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갈등관계에 들어가고 급기야 오스트리 아 편에서 제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독일제국은 패배 후 혁명과 함께 붕괴 되고 만다. (1918년 11월)


이제 독일은 더 이상 왕가에 의해 지배 되지 않는 공화국(바이마르 공화국)이 되었 는데, 전쟁보상 문제에다, 급격한 인플 레이션 사태, 그리고 좌우익 대립의 온 상이 된 공화국은 처음부터 시련에 봉 착하게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통화개혁(슈트 레제만 개혁) 등 일련의 적극적인 전후 복 구책 실시로 독일재건의 기틀을 마련 하고자 노력하고 외교적으로도 국제연 맹에 가입(1926)하고, 부전不戰 조약에도 서명(1929) 하는 등 안정적 발전을 위하 여 힘을 쏟았다. 하지만 1929년의 세 계공황사태에 따른 경제적 궁핍과 사 회불안을 겪으면서 독일국민은 1933 년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며 민 족공동체의 비전을 제시하고 나온 나 치당(국가사회주의당 NSdAP)의 히틀러를 지 도자로 선택하게 된다.

이후의 역사는 독일국민과 인류에게 잊을 수 없는 ‘악마적’ 독일 체험의 장 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병 합,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합병, 폴란드 침공 등 계속적인 영토확장 정책은 급 기야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되 었고, 또다시 패전하여 전범국으로 국 제 심판을 받을 때까지 독일과 독일국 민은 결코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의 멍에를 스스로 짊어지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전범재판으로 책임자 처단이 이루어지면서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하지만 서독은 ‘라인강의 기적’이란 말 그대로 폐허를 딛고 일어 서서 경제 발전의 모범국으로 우뚝 서 게 된다. 물론 동서 대립의 냉전구도의 틀 속에서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 영의 지원이 그 바탕이 된 것이지만, 사회복지와 자유경쟁체제의 병립이라 는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을 통해 이루 어낸 성과라는 점에서 서독의 발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독일의 재통일과 유럽통합
1990년 10월 3일 독일인들은 현대사 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맞이하였다. 1989년 11월 9일, 1961년 이후 동서 베를린을 막아놓았던 장벽이 허물어 지는 순간 동서의 모든 독일인은 직접 현장에서, 혹은 TV를 통해서 극적인 열광의 순간을 체험한 뒤 1년이 채 지 나지 않은 때였다. 당시 소련 고르바초 프 대통령의 페레스트로이카(재건)라는 경 제개혁 정책으로 새로운 사회주의 국 가를 열망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상태 에서 개국 40주년을 맞이하는 동독에 서는 인민들의 일반적인 불만이 가시 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서 독과의 밀약을 통해 헝가리가 오스트 리아로 향하는 국경을 개방하면서 탈 주자들의 러시가 이어졌다. 라이프치 히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엄청난 군중 이 월요 시위에 참가하게 되었고, ‘우리 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의 시위구호 는 어느새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로 변해 가면서 통일에의 요구 는 밑에서부터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갔 다. 당시의 콜 수상은 급변하는 정세에 따라 조속한 통일이란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2차대전 후의 전승 4개국과의 4+2 협상(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4개국과 동ㆍ서 독 일 사이에 벌어진 통일 관련 협상)을 거쳐 동독의 서독 편입이란 형식으로 동서독 통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통일을 위한 구체적 논의 과정 에서 이미 가시화될 문제는 산적해 있 었고, 반세기 가까이 매우 이질적인 사 회상황에서 살아온 민족 구성원들의 실질적인 통합의 어려움이 예견되기도 했지만, 통일 후의 상황은 동서독 주민 들간의 갈등으로 비화되며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겪게 되었다. ‘베시와 오 시’(Wessi/Ossi), 즉 서독지역 주민과 동독 지역 주민이 상호간에 불화와 반목을 표현했던 이 유행어는 20년이 지난 지 금까지도 극복해야 할 문제로 남아 있 다. 이에는 무엇보다, 동독주민들의 경 제상황 등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2류 국민으로 폄하되는 느낌의 자존심 문제와 함께 서독주민들이 끝없이 물 어왔던 통일세와 동독주민과의 문화적 차이 등 이질적 요소들을 들 수 있겠 다. 하지만 통일 당시 서독의 경제적 여 유와 구 사회주의권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였던 동독의 사회기반 덕분에 사 회통합과정은 그나마 큰 외형적 마찰 없이 진행되어 오고 있는 셈이다. 독일 의 통일 과정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조건 속에 예견되는 남북한의 통일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끔 해 준다.


2. 정치지형과 행정체제

신성로마제국 이후의 지방분권적 지배 체제는 1871년 통일제국이 형성되기 까지 느슨한 연방적 형태를 띠고 있었 고, 이는 1945년 이후 동서독으로 분 단된 상태로 45년을 지내오면서 최근 에 이르기까지 독일의 중요한 정치지형 을 구성하고 있다.

현재 독일은 16개의 연방주로 구성된 연방공화국이다. 각 주는 많은 다른 나 라들과는 달리 중앙정부에 예속된 형 태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주권을 지닌 하나의 국가라 할 수 있다. 각 연방주 는 헌법이 명시하는 공화주의, 민주주 의, 사회국가, 법치국가의 원칙을 대의 로 하는 주 헌법을 갖고 있으며, 이는 연방의 구속을 받지 않고 제정 또는 개 정할 수 있다. 이러한 분산형 국가체체는 역사적으로 선진국화 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지만, 그 나름 많은 장점을 지 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인구분산 과 함께 각 지역의 다양하고 공평한 발 전, 독자적인 향토문화 보존 등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주정부 자체의 신속한 행정처리, 새로운 제도나 정책을 우선 적으로 실험 운용해 보고 연방정부에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독일은 내각 수상을 행정 수반으로 하 는 의원내각제 중심의 정부형태를 갖고 있다. 독일연방은 득표에 따른 각 정 당의 연정형태로 집권여당이 결정되는 데, 각 주에서도 저마다 연정을 구성 해 주지사가 선출된다. 연방대통령이 국 가수반으로 선출되지만 그 역할은 상 징적이고 외교적으로 국가를 대표하 며, 초당적인 존재로서 각 당의 갈등 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현 재 독일의 대통령은 동독 출신으로 독 일 통일 과정의 공동추진자Mitgestalter였 던 요아힘 가우크Joachim Gauck이며, 불명 예 중도사퇴한 전임 크리스티안 불프 Christian Wilhelm Walter Wulff에 이어 2012 년 3월 18일 임기 5년의 제11대 대통 령으로 선출되었다.

현실 정치의 실권을 행사하는 내각의 수상은 연방 의회(연방 하원)의 과반 수를 얻은 자로서 대통령이 임명하며 임기는 4년이다. 입법 기관은 연방 상 원과 연방 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 로서 상원은 연방 의회의 의결에 대한 거부권이 없다. 연방 의회 의원은 비례 대표제와 소선거구제를 병용한 직접 선거인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선출 되고 임기는 4년이다. 연방 상원은 각 주와 특별시에서 인구 비례에 따라 임 명된 대표로 구성되며, 주 정부는 연 방 상원을 통하여 연방의 입법과 행정 업무에 참여한다. 입법권은 연방 의회 와 연방 상원 모두에 있으나 실질적 권 한은 연방 의회(하원)에 있다.

독일연방은 1990년 동서독통일을 이 룬 기민당CDU의 콜Helmut Kohl 수상이 1982년부터 무려 16년동안 집권한 이후 사회민주당SPD의 슈뢰더Gerhard Schroder(1998-2005)를 거쳐 지금은 동독출 신의 기민당 여성 정치인 메르켈Angela Merkel(2005~)이 제8대 수상으로 집권하며 유럽통합의 대업을 수행해 가고 있다.

독일 수상 중 1969~1974년 사이에 재 임했던 사민당의 브란트Willy Brandt 수상 은 특히 동서통합의 길을 열었고 오늘 날의 재통일을 위한 초석을 닦았다는 점에서 그 누구보다 존경받고 인정받는 인물이다. 히틀러의 권력장악 이후 노 르웨이, 스웨덴 등지로 망명해 반나치 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수상 재직시 냉 전체제 하에서 1민족2국가라는 기치 하에 대화와 우호관계 수립, 경제교류 등 새로운 동방정책을 표방하면서 우 편 및 전화교류 등 두 나라의 갈등관계 를 해소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특히 그가 1970년 12월 7일 폴란드를 방문 하여 나치에 희생당한 바르샤바의 유 대인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나치의 만행에 대해 용서를 구했던 사건은 전 세계인에게 독일이 사죄와 화해를 하기 위한 적극적인 제스처로 받아들여졌고 이로부터 신 동방정책의 성공적인 결실 이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경제대국 독일

독일경제의 저력
흔히 독일인들의 특성으로 언급되는 철저함, 정확성, 책임의식 등의 표현 은 특히 일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곧 독일 제품의 우수성과 연결되기도 한 다. ‘Made in Germany’. 원래 1887년 영국에서 독일 제품은 질이 낮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붙였던 이 상표가 지금은 세계적으로 품질과 신용의 상 징이 되었다. 독일은 현재 세계 4위의 경제대국이며 수출입 면에서는 미국 에 이어 2위의 교역국으로 손꼽힌다.

독일 경제는 제조업을 통한 수출을 근 간으로 한다. 이러한 독일 경제의 힘 은 무엇보다 중소기업에서 나온다고 한다. 국제적 대기업은 미국에는 독일 보다 네 배, 일본에는 두 배가 많고 심지어 프랑스도 독일보다 많다. 독일 수출 성공의 주원인은 중소기업, 정확 히 말하면 소위 ‘히든 챔피언’으로 칭 해지는 엘리트 중소기업에서 이유를 찾 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몇 개의 재벌회 사나 대기업들이 산업의 거의 모든 영 역을 지배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독일에서는 수 백 년 전통 속에 우수한 기술을 갈고 닦아온 중소기업에서 만들어진 제품 들이 전 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세계 정상급 중소기업에 대한 한 목 록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2,734개 의 회사가 있는 데 그 중 독일 회사가 문자 그대로 1,307개이다. 이들 중소 기업들이 독일수출의 4분의 1을 차지 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일만의 현상이다. 왜 독일에는 이처럼 전문화된 중소기업 이 많은가? 그 원인을 찾아보면 부분 적으로 과거 역사까지 아우르는 독일 특유의 현상과 만나게 된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독일은 19세기 말경까지 중앙집권 국가 아니라 수많 은 선 제후국가로 나뉘어 있었다. 크 게 성장하려는 기업은 ‘국제화’, 즉 바 로 옆에 있는 이웃 나라들로 진출해 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독일 기업의 국제화하려는 욕구는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다. 독일의 작은 기업들은 외 국의 기업들보다 아주 일찍 수출을 시 작한 셈이다. 이러한 교역의 풍부한 가 능성을 기초토양으로 하여 독일은 현 재까지 그 영향을 미치는 수백 년의 전통을 갖는 우수한 기술들이 대를 이어 그 지역의 특산제품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시계, 의료기구 등 정밀성 을 요하는 기술 뿐 아니라 칼, 대체에 너지 기술 등이 지역 군집 형태로 클 러스터cluster(산업집적지)를 형성하고 있으 며 인근의 동 기종 업체와의 치열한 경쟁 속에 최고의 제품을 만드는 동 력을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독일산업의 모체는 ‘실무와 이 론 동시 교육제도Duale Berufsausbildung’에 서 찾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일하 게 독일어권 국가에만 존재하는 실무 와 이론을 같이 학습하는 이 제도는 독일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한 한 원인으로 꼽히며, 많은 나 라들이 독일의 이 제도를 도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독일은 프랑스와 함께 유럽공동체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 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럽연합(EU) 내에 서 실질적인 리더국을 자임하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
19세기 말, 여타의 유럽 제국주의 열 강들과 마찬가지로 독일도 한국과의 첫 접촉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고 종 3년(1866) 독일사람 오페르트는 입국 을 교섭하다가 거절당했으며, 2년 후인 1868년에 다시 프랑스 신부와 미국인 을 대동하고 차이나호를 타고 충청도 행담도行擔島에 정박하였다. 그는 가야 동에 소재하고 있는 흥선대원군의 생 부인 남연군南延君의 분묘를 발굴하려 다 실패(1868년)하였으며, 경기도 영종진 을 습격하려다가 역시 성공하지 못하 고 돌아갔다. 이 굴총 강도사건은 흥 선대원군의 배외정책을 강화시키는 결 과를 초래한 동시에 그 후 국제적인 문 제를 야기시켰다.

독일과 조선이 통상조약을 맺은 것은 1883년 11월 26일이지만 이는 경술국 치(1910, 한일강제병합)로 인해 더 이상 이어 지지 않았다. 대한민국과 서독간의 외 교관계는 1955년 12월 1일 재개되었 다. 이후 서독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에 많은 지원을 해 주었으며, 특히 광 부(1963)와 간호사들(1965)의 파견으로 독 특한 경제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독일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현재 제8위 의 수출국, 제6위의 수입국이다.


4. 종교와 문화

종교관의 변화
유럽의 역사는 한마디로 기독교의 역 사다. 교회는 수십 년 동안 유럽의 정 치와 문화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다.

최근에 와서 외래종교나 웰빙문화 관 련 서적, 또는 영상이 세속화 과정 을 보여주고 있지만 독일은 변함없 이 기독교적인 국가다. 8200만 총인 구 중 74%에 해당하는 인구가 종교 에 귀속되어 있고, 59.8%에 해당하 는 4천8백만이 기독교인이다. 총인구 의 28.9%가 개신교에 속하고 29.9% 가 가톨릭교회 구성원이다. 이 두 그 룹 외에 이슬람교, 그리이스정교, 불 교, 유대교 등 소수 종교집단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기독교인들 대부분 은 더 이상 교회기관의 전통적인 신 앙적 관점에 메여있고자 하지 않는다.
전 인구의 3분의 1 가량만이 ‘죽은 자 의 부활’을 믿고 있다고 표명하였으며, ‘신’이란 존재를 ‘지고의 가치’나 ‘영원 히 가치를 인정받는 법칙’ 정도로 이 해하고자 한다. ‘신앙심’이란 것을 더 이상 교회란 제도와 연관 지어 생각하 지 않으며, 교회 내에서도 ‘비정통적’ 신앙관이 그 폭을 크게 넓히고 있다. 지금은 종교를 이해함에 있어 정신적, 문화적, 사회 경제적 차원이 중시되 고, 이슬람교, 유대교 등 타 종교와의 교류와 관계성이 중요한 화두가 되고 있다. 종교가 사회의 중요한 한 부분 을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이는 삶의 자세나 영위함에 있어서의 대안적 관점 을 제공하느냐의 여부가 중시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입장에서 교회는 개인의 일생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이는 시간적 순서로 세례식, 입 학, 첫 영성체식, 견진성사, 결혼식, 장례식으로 열거해 볼 수 있다. 대개 남쪽지방은 가톨릭이 우세한 데 비해, 종교개혁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북쪽지 방은 개신교가 우세하다. 독일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아직도 모든 근로자 들이 서류에 자신의 종교사항을 기입 하고, 기독교도임을 밝힌 사람은 누구 든지 소득세의 8, 9퍼센트를 종교세 로 낸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이를 활 용하여 교회의 유지비용으로 사용하 고, 구제 사업, 또는 제 3세계국가에 대한 원조를 하고 있다.


독일문화의 특성
‘독일인’ 하면 근검, 절약 정신, 철저함 과 정확성, 그리고 우직함, 강인함, 세 련되지 못함 등의 평을 듣는다. 아무 튼 기교적이거나 세련된 느낌과는 거 리가 먼 독일인에 대한 인상은 독일 을 설명하는 각 분야에서 단점과 장점 으로 증명된다. 우리에게 알려진 영화 들 속에서 보여지는 독일인들의 모습 은 많은 경우 - 물론 1, 2차 세계대전 의 패전국의 역할을 맡아 부정적 군상 이 되기도 했지만 - 대체로 개인적 판 단보다 명령과 원칙을 철저하게 따르는 좀 우둔하고 여유나 배려 없는 우스꽝 스러운 모습으로 희화화되기도 한다.

‘독일 병정’이라는 표현이나, 축구팀을 칭하는 ‘독일 전차’ 등의 별명은 이러한 독일인에 대한 일반적인 선입견을 나타 내준다.

프랑스, 이태리 등 라틴 계통의 사람들 에 비해 독일인들은 음식문화도 상당 히 소박한 편이다. 독일음식 하면 많은 경우 구운 소시지Bratwurst, 자우어크라 우트Sauerkraut(일종의 독일식 김치), 다양한 감 자요리, 그리고 한잔의 맥주를 연상하 게 된다.

맥주 하면 곧바로 뮌헨의 10월 축제 Oktoberfest로 연결된다. 9월 말부터 10 월 초까지 2주간에 걸쳐 열리는 이 축 제는 매년 600만명이 찾는 세계최대 규모의 민속축제이다. 전통의상을 입 은 여종업원들이 가져다주는 커다란 잔의 맥주를 마음껏 마시며, 국적에 관 계없이 밴드에 맞추어 밤새도록 웃고, 떠들고, 함께 노래하고 춤춘다. 외국인 관광객이 참가인원의 15%에 이르며, 1810년 바이에른의 황태자 루트비히 1 세와 테레제 공주의 결혼식을 축하하 기 위해 시작된 이 행사는 해가 갈수 록 다양해지고 규모가 커져 독일의 가 장 대표적인 축제가 되었다.

맥주는 독일사람들의 정기적인 만남도 주선해준다. 슈탐티쉬Stammtisch, 즉 단 골모임은 특정 주점에 지인들이 정기 적으로 모여 카드놀이를 하거나, 관심 사항, 혹은 정치나 철학얘기를 나눈다. 조직적인 성격을 띠지 않지만 나름대 로 참가자들 사이에 동질성을 부여하 고 있는 이 모임은 종종 일종의 여론형 성의 자리로도 역할을 담당한다. 독일 인의 맥주 소비량은 일인당 세계 최고 를 기록하고 있다.

독일인들은 일과 휴식의 구분이 엄격 하다. 비교적 긴 휴가일수를 이용하여 독일인들은 독일 내 뿐만 아니라 전 세 계로 여행을 다닌다. 통상 6개월 전에 이미 예약을 끝내고 계절에 맞추어 바 다, 스키장, 숲을 찾아다니고, 문화체 험을 곁들이기도 한다. 이미 오래 전부 터 생활체육이 육성되어 있으며, 문화 관련 산업은 행정당국의 지원을 많이 받아 영화, 연극, 오페라, 향토 민속축 제, 박물관, 전시관 등 다양한 볼거리 를 제공한다.

전통적인 것에 가치를 크게 두는 편이 고 일상에서 규칙과 법규를 잘 지키는 절제된 삶을 사는 독일인이지만 속도 제한이 없는 아우토반에서 마음껏 자 동차를 타고 달리는 모습은 독일의 중 추 산업인 자동차산업의 부수현상으 로 생각된다. 보통 지나칠 정도로 신 호등이나 운행규칙을 잘 지키는 편이 지만 안개 낀 고속도로에서 100중 추 돌사고 등의 뉴스도 종종 접하게 되는 것은 독일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09년엔 259중 추돌사 고가 기록된 바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괴테, 하이네, 슈베르트, 베 토벤, 칸트, 헤겔, 칼 맑스, 니체 등 세 계의 교양문화를 선도해온 독일과 나 치, 유대인학살 등 끔찍한 역사를 살 아온 독일. 이 두 독일의 양면성은 앞으 로도 독일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뇌리 에 항상 기억될 것이다.


 

-  출처 월간개벽 20130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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