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도와 세계문화

전통과 진보가 공존하는 신사의 나라, 영국

강영한

2013.07.01 | 조회 10223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신사의 나라(?), 영어의 고향, 엘리자베스 2세, 버버리(Burberry)나 닥스(Daks), 박지성이 뛰는 축구의 나라! 이 정도면 한국사람 치고 영국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한때 세계의 정치경제를 주름잡고 이끌었지만, 지금은 조용히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라, 영국. 영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가?




영국의 형성과정

국명의 유래
유럽 대륙 서북쪽에 있는 섬나라 영국. 영 국의 진짜 이름은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 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줄여서 Great Britain 혹 은 United Kingdom이라고 한다. 흔히 GB, UK로 간단히 표기한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세 계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인 그레이트 브 리튼 섬 남동부의 잉글랜드England, 북부의 스코틀랜드Scotland, 남서부의 웨일즈Wales, 그리고 아일랜드 섬 북동부에 위치한 북 아일랜드Northern Ireland라는 네 자치 국가로 이루어진 연합 왕국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국英國’은 ‘잉글랜드 England’의 한자 표기이다. ‘영英’은 잉글랜드 의 잉Eng을 음역音譯한 것이고, ‘국國’은 랜드 land를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고 영국이 곧 잉글랜드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잉 글랜드는 영국을 구성하는 홈 네이션의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브리튼Britain 혹은 유케이 UK라고는 하지만 잉글랜드라고 하지는 않 는다. 특히 스코틀랜드나 웨일즈, 북아일 랜드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연합왕국의 형성과정
영국을 이루는 이들 네 나라를 홈 네이션 Home Nation이라고 하는데, 웨일즈는 1282년 에 에드워드 1세가 정복한 뒤 반포한 러들 랜 법Statute of Rhuddlan에 의해 잉글랜드 왕 국의 행정구역으로 통합되었다. 이때부터 재위 군주의 왕세자에게 웨일즈 공이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지금의 웨일즈 공은 엘 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남인 찰스 왕세자 로, 1969년에 봉해졌다.

웨일즈가 잉글랜드에 공식적으로 합병된 것은 16세기이다. 헨리 8세가 1536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즈를 한 의회로 통합하였 다. 그동안 웨일즈에는 자치권이 거의 없 었으나, 1999년에 웨일즈 국회가 공식적 으로 다시 개원되었다.

스코틀랜드는 1603년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 스 6세가 잉글랜드 및 웨일즈 왕국의 통합 왕 제임스 1세로 등극하기 전까지 자국의 왕 정과 국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1707년 에 잉글랜드와 연합하였다.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앤 여왕은 스튜어트 왕조라는 한 줄기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따로 통치되던 것을 연합법을 통해 서로의 자치권 을 보장하며 통합한 것이다. 이로써 그레이 트 브리튼 왕국이 성립되었고, 스코틀랜드는 지금까지 영국의 홈 네이션으로 남아 있다.

1801년 연합법으로 아일랜드 왕 국이 잉 글랜드 왕국에 편입되어 그레이트 브리튼 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되었다. 그러나 1922년 아일랜드 독립전쟁으로 남부의 아 일랜드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하였 고 북아일랜드는 자치권을 보장받으며 그 대로 남았다. 북아일랜드는 이후 독립의 과정을 거치다 지금은 독자적인 의회를 가 지면서 영국의 홈 네이션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영국의 국호는 지금의 그 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바뀌었다. 영국의 현재 국기인 유니온 기The Union Flag, Union Jack 또한 이를 반영하였는데, 먼 저 잉글랜드 기와 스코틀랜드 기가 통합되더 니, 이것이 다시 아일랜드 기와 합쳐졌다. 국 기에도 세 국가가 연합한 흔적이 선명하다.



그들만의 문화, 잠재된 민족갈등
영국의 홈 네이션들은 지금도 자치정부, 자치의회, 자치수도를 가지고 있다. 또 그들만의 언어, 그들만의 종교, 그들만 의 문화도 유지하고 있다. 지난날 영국 에서 일어난 종교갈등, 민족갈등, 지역갈 등의 원천은 이렇게 다른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네 나라를 하나로 합병한 데 기인한다. 독립의 과정에서 가 해진 온갖 폭력적 행위는 증오와 원한만 을 천지에 가득하게 하였고, 지역 및 종 교적으로 반감과 적대감만 키워왔다. 비 록 지금은 잠재하고 있지만 독립을 요구 하는 거센 물결이 언제 다시 일렁거릴지 모른다.



섬나라다운 자연환경

영토적 특성
영국은 땅덩어리가 한반도의 1.1배로 약 244,000㎢이다. 브리튼 섬의 남부를 차 지하는 잉글랜드가 약 130,400㎢로 가장 넓고, 그 다음이 스코틀랜드 78,800㎢, 웨일즈 20,800㎢, 북아일랜드 13,600㎢ 순이다. 국토의 동서의 길이는 약 500km, 남북 연장은 1,000km 정도이다.

남부와 동부는 주로 저지의 농경지이고, 북부는 남부나 동부보다 산이 더 많다. 잉 글랜드의 척추라 할 수 있는 페나인 산맥 이 브리튼 섬 중부에 있지만 그리 높은 산 은 별로 없다. 영국에서 가장 높은 산은 스코틀랜드에 있는 1,343m의 벤 네비스 산이다.

잉글랜드 북서부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많 다. 레이크 디스트릭트에는 가장 큰 윈더 미어 호수를 비롯하여 열 댓 개의 크고 작 은 호수들이 있는데, 해질녘에 바라보는 호수 경치는 모든 사람들을 취하게 하고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유럽대륙과의 연계
주변 국가를 보면 영국은 영국해협을 사 이에 두고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와 마 주한다. 대륙과 가장 짧은 거리는 약 34 ㎞에 지나지 않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약 50㎞의 채널 터널Channel Tunnel; Le tunnel sous la Manche(영국과 프랑스간의 도버 해협을 연결하는 해저 터널) 로 이어져 기차로 통행할 수 있다. 유로스 타를 이용하면 런던에서 파리까지는 두 시 간 조금 더 걸린다. 다른 나라를 보면 덴 마크나 노르웨이와는 북해를 사이에 두고 있고, 본토를 중심으로 반대쪽으로는 아 일랜드 해를 두고 섬나라 아일랜드 공화 국과 접하고 있다.


변덕스러운 기후 환경
영국은 서울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그래 서 서울보다 더 추울 것 같지만, 더 온화 하다. 멕시코 난류와 편서풍의 영향으로 대체적으로 온난한 기후를 나타낸다. 연간 강수량은 많지 않으며 1년 내내 날씨가 흐 리고 지나가는 비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연중 비오는 날이 반 이상인데, 비가 많이 오는 것이 아니라 찔끔찔끔, 부슬부슬 온 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우산을 준비하 지 않기도 한다. 그 정도면 그냥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섬나라이기 때문에 습한 날씨가 특징이지 만, 날씨가 맑다가 갑자기 비가 오거나 추 워지기도 하는 등 영국 날씨는 급변한다. 아이슬란드 저기압의 영향 때문인데 아주 변덕스럽다. 그래서인지 여름에 파카를 입 는 사람도 입고 겨울에 반팔 티셔츠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누가 힐끔거 리며 보지도 않는다. 어떤 때는 거리 사람 들의 옷차림에서 하루에 네 계절의 옷을 동 시에 볼 수도 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는 가을~겨울에 비가 많이 오고, 런던은 겨울 에 안개가 많이 끼는 특성을 보인다.

영국에서는 기온이 영하10° 밑으로 내려가 거나 32° 이상으로 올라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혹시라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 씨라도 되면 많은 사람들이 공원이나 집 정원 또는 옥상에서 일광욕을 즐긴다. 웃 통을 벗어던진 남자들, 비키니를 입은 여 자들이 남의 시선 마다하지 않고 이런 저 런 자세로 햇살을 즐기는 모습이 우리의 문화와는 사뭇 다르다.


왕조로 이어진 역사

시원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의유입
유럽의 정복국가인 로마의 지배를 받기 전 에 브리튼 섬에는 기원전 수백년 전에 원 주민을 정복하고 유럽에서 이주해 온 켈트 Celts족이 오랫동안 살고 있었다. 켈트족 중 게일족과 브리튼족이 영국 땅에 정착하였 으며, 브리튼족은 영국의 이름인 ‘브리튼 Britain’의 어원이 되었다. 그런데 기원전 55 년부터 브리튼을 침입하고 약 100년 뒤 잉 글랜드 땅을 정복한 로마제국은 이들 켈트 족을 제압하였다. 그리고 약 400년간 스 코틀랜드 북부를 제외한 브리튼 전 지역을 지배하였다. 당시 로마인들은 브리튼 땅을 ‘브리타니아’라고 하였으며, 당시 로마 군대 는 템즈 강 주변을 기지로 쓰며 항구 이름 을 ‘론디니움Londinium’이라 하였는데, 이곳 이 뒷날 영국의 수도 런던이 되었다.

그런데 5세기 들어 브리튼 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인해 로마제국이 위협받자 로마 황제 호노리우 스는, 로마 본토를 지키기 위해 “브리튼 의 제국민들이여! 로마를 위해 자신의 지 역을 스스로 방어해주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로마군을 철수시켰다. 로마인이 떠 난 뒤 브리튼 섬에는 독일, 덴마크, 네덜란 드에서 이전부터 침입하던 게르만 계열의 주트족, 앵글족, 그리고 색슨족이 들어와 지배한 것이다.

이들은 브리튼 땅을 차지하며 7세기 초까지 각각 켄트 왕국, 에식스 서식스 웨식스 왕 국, 이스트 앵글리아, 머시아Mercia, 노섬브리 아Northumbria 왕국 등 7개 소규모 왕국을 세 웠다. 잉글랜드라는 말은 이들 중 세력이 강하였던 ‘앵글족의 나라’라는 의미에서 시 작되었다. 브리튼 섬이 앵글로색슨족의 땅 이 된 것이다.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이들 앵글로색슨족이 지금 영국의 뿌리이다.

이들 여러 왕국이 패권 싸움을 한 결과, 8 세기에 이르러 머시아, 노섬브리아, 웨식스 세 왕국만 남게 되었고, 829년에는 이것도 웨식스 왕 에그버트Egbert에 의해 하나로 병 합되었다. 에그버트는 잉글랜드 통일의 바 탕을 마련하였다.


데인족의 침입과 노르만 왕조의 등장
그런데 8세기 말부터 외부로부터 침략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북게르만족의 일파로 서 바이킹인 데인족Danes의 습격이 잦았다.

비록 알프레드 대왕 때 앵글로색슨족이 이들과 맞서 하나로 뭉치기도 하였으나, 데 인족의 침입이 계속되더니 1016년에 덴마 크 왕의 아들인 크누트 왕이 잉글랜드 왕 위에 올랐다. 덴마크 바이킹계 크누트 왕 과 두 명의 왕이 더 통치한 뒤에는 노르망 디에 망명 중이던 브리튼계의 참회왕 에드 워드가 잉글랜드 왕권을 복원함으로써 바 이킹 시대는 끝났다.

23년간 통치하던 에드워드가 1066년에 죽 자 귀족들은 에드워드의 처남인 해롤드를 후계자로 추대하려 하였다. 이에 에드워드 의 사촌인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노르만 족을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하였다. 그리 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영국 해롤드 왕을 물리치고 1066년에 영국의 새로운 왕 윌리 엄 1세로 등극하였다. 영국 역사에 프랑스 계 노르만 왕조(1066~1154)의 문이 열린 것이다. 이로써 영국 귀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노르만 왕조는 영국 영토를 완전하게 지배 하는 사실상 최초의 왕조였다. 윌리엄은 브 리튼을 정복하고 대륙의 봉건제도를 잉글 랜드에 도입하였다. 이로써 브리튼 섬은 비 로소 유럽의 일부가 되었다. 노르만 왕조가 열림으로써 프랑스에서 많은 노르만인들과 다른 부족들이 영국에 건너와 정착하였는 데, 그로 인해 기존의 영국 문화가 크게 바 뀌었다. 이를테면 지배계급이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면서, 이 말이 앵글로색슨족의 말과 섞여 오늘날 영어의 바탕이 되었다.

노르만 왕조는 직계 왕위를 그리 오래 유 지하지 못했다. 3대 스티븐에서 끊어졌다. 노르만 왕조 헨리 1세의 외손으로 프랑스 인 아버지를 둔 헨리 2세가 스티븐을 이어 왕위에 오름으로써 성이 바뀐 것이다. 이 로써 플랜테저넷 왕조(1154~1399)가 열렸다.


플랜테저넷, 요크, 튜더 왕조의 전개
플랜테저넷 왕조의 에드워드 3세는 유럽 대륙을 지배하려는 꿈을 꾸었다. 그는 당 시 프랑스 왕실의 적통이 끊긴 것을 빌미 로 삼고 어머니가 프랑스 공주인 점을 내 세우며, 외척 혈통인 자신이 프랑스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잉글랜드가 브리튼 섬에 갇혀 있다가 대륙으로 날개를 활짝 펴려는 시도였다. 이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전쟁(1337-1453)을 벌였다. 당시 쓰러져가는 프랑스를 구한 것이 누구나 잘 아는 잔다르크였다.

리처드 2세를 끝으로 플랜테저넷 왕조가 끝났다. 플랜테저넷 가家의 분가로 플랜테 저넷 왕조 에드워드 3세의 손자 헨리 4세 가 랭카스터 왕조(1399~1471)를 개창했다. 헨 리 6세 때 요크 공 에드워드는 타우턴 전 투에서 승리하고, 자신을 에드워드 4세라 칭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요크 왕조(1471~1485) 의 첫 주인이 된 것이다.

요크 왕조의 마지막 왕 리처드 3세가 조 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랭카스터 가계의 왕위 계승권자이며 프랑스에 망명 해 살고 있던 헨리 튜더가 가만히 있지 않 았다. 1485년 보스워스 평야에서 양군 사 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것은 붉은 장미 를 상징으로 하는 랭카스터 가문과 흰 장 미를 상징으로 하는 요크 가문이 사생결 단을 내리는 전투였다. 흔히 장미전쟁(1455- 1485)이라고 하는 전쟁을 두 가문은 30년 간 계속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헨리 튜더 가 리처드 3세를 죽임으로써 전쟁이 끝났 다. 헨리가 즉위하여 헨리 7세라 칭함으 로써 요크 왕조가 막을 내리고 튜더 왕조 (1485~1603)의 문이 열렸다.

튜더 왕조는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의 아픈 상처를 안고 출발했다. 그러나 영국의 기 틀은 헨리7세-헨리8세-에드워드6세-메 리1세-엘리자베스1세로 이어지는 이 튜더 왕가에 의해 잡혔다.

그 중 헨리 7세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를 만들었고, 헨리 8세는 절대군주제 의 확립 및 종교개 혁을 통해 성공회 를 국교로 만들었 다. 대륙의 거대한 문화적 끈인 교황 과 결별하여 성공 회를 만들어 스스 로 영국 국교의 수 장이 된 것이다.

뒤를 이어 에드워 드 6세와 큰 딸 메리 1세를 거치며 잉글랜 드는 다시 장미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듯했으나,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하면서 그런 기우는 사라졌다. 그녀는 풀리지 않 을 것 같던 종교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 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최강국이었던 스페 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는 등 대영제국의 기반을 다졌다.





스튜어트, 하노버, 윈저 왕조의 계승
자녀가 없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왕위를 사촌인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에게 넘겼다. 제임스 6세는 처음으로 두 나라 를 통일하고 스코틀랜드계인 스튜어트 왕조 (1603~1649)를 연 제임스 1세가 되었다. 뒤이어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의 회와 왕 간의 내전 결과, 영국의회는 왕을 처형하여 왕가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 포하였다. 1660년 왕정복고 시기까지 공화 정을 이끈 것은 크롬웰이었다.

스튜어트 왕조의 부활(1660~1714) 시기 마지막 왕인 앤은 1707년 스코틀랜드, 웨일즈 의 회를 병합하여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을 만 들었다. 앤은 후계자가 없이 죽었다. 앤의 유지를 받든 슈루즈버리 공작은 하노버 선 제후의 부인이자 제임스 1세의 손녀인 소 피아와 그녀의 몸에서 태어난 프로테스탄 트 자녀들이 왕위를 잇도록 하는 법을 선 포했다. 이로써 잉글랜드의 왕위는 독일 하노버 가의 손으로 넘어갔다.

조지 1세로부터 시작되는 하노버 왕조 (1714~1901)는 정치적으로 의회 민주주의 정 치를 처음으로 실현하였고, 식민지도 많이 개척하여 영국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이 지배하던 때(1837~1901)에 영 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영국은 아편전쟁(1839~1842)으로 중국의 쇄국을 깼고, 1857년 인도의 세포 이 반란을 진압하여 인도를 직할지로 만들 었으며, 1856년부터 7년 전쟁을 통해 캐나 다를 점령하는 등 식민지 제국을 이룩하였 다. 한마디로 영국은 세계의 많은 나라를 정복한 제국이었고, 산업혁명을 통해 가장 잘 사는 국가였으며, 무역을 통해 엄청난 자본을 축적한 나라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왕이다.

1901년 하노버 왕가의 여왕 빅토리아가 세 상을 떠나자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 황혼 기인 59세에 에드워드 7세로 왕위에 올랐 다. 빅토리아의 아들 에드워드 7세의 즉위 후 빅토리아의 남편이었던 앨버트 공의 성性 인 작센-코부르크-고타가 왕조명이 되었다.

이어 에드워드 7세의 차남인 조지 5세에게 왕권이 넘어갔는데, 그는 독일계 작위 칭호 를 버리고, 1917년에 왕궁 소재지의 이름 을 따라 왕조명을 윈저로 바꾸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함 으로써 영국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지금 의 영국은 윈저 왕조의 네 번째 왕인 엘리 자베스 2세가 1952년부터, 우리의 전통으 로 말하면, 사람이 환갑을 맞은 긴 세월을 통치하고 있다.



정치와 행정체제

정치체제 - 입헌군주국
영국은 현재 엘리자베스 2세를 국가 원수 로 하는 군주국이며, 의회민주주의를 펼 치는 나라이다. 왕정과 의회정치가 절묘 하게 결합된 입헌군주국이다. 왕위 세습 을 원칙으로 하는 영국의 군주인 국왕은 전통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1215년 대헌장, 1628년의 권리청원, 1689 년의 권리장전으로 이어지는 왕권을 제한 하려던 역사 흔적은 왕권이 얼마나 강하 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19세기 말 부터 군주의 역할이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개혁되었다. 지금도 국왕은 국가를 상징 한다. 법적으로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장 이고, 군의 최고 사령관이며, 국교인 성공 회의 수장이다. 그러나 왕은 군림하되 통 치하지 않는다. 정치적인 역할은 의례적일 뿐이다.


정부형태 - 양원제하의 내각
나라의 실제 행정은 선거를 통해 하원의 다수 의석을 차지하는 당이 집권당·하원 제1당이 되고, 관례에 따라 국왕이 이 당 의 당수를 총리로 지명함으로써 이루어진 다. 영국 정부는 총리를 행정 수반으로 하 는 내각책임제이다.

영국 정부의 공식적 명칭은 ‘여왕 폐하 정 부’(Her Majesty’s Government)이다. 영국의 모든 공공기관은 여왕 정부를 위해 봉사한다. 그래서 경찰이나 소방서, 우체국은 물론 형무소 등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자나 문서를 보면 흔히 ‘HM’이라는 문 구를 볼 수 있다.

총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의무의 하나는 하 원 내 다수당의 지도자로서 하원에 정기 적으로 출석하여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는 것이다. 하원에서 여야가 코를 맞댈 정도 로 가까이하며 열띤 논쟁을 벌이는 모습 은 매우 인상적이다. 누가 금방 한 대 치기 라도 할 듯한 분위기가 자주 연출되지만 폭력은 일어나지 않는다. 야당 자리와 여 당 자리는, 칼을 빼 들어도 상대방에 닿지 않을 거리를 두고 마주본다. 각 진영의 앞 에는 어떠한 싸움이 나도 서로 절대 넘지 말아야 할, 붉게 그어진 두 선이 암묵적으 로 폭력을 막는 듯하다.

초기에 영국 왕은 종교 지도자와 귀족으 로 구성된 협의회의 자문을 받아 나라를 다스렸다. 그것이 발전하여 이 협의회의 귀족들이 상원이 되고, 기사들은 하원이 되었다. 오늘날 영국 의회는 상원과 하원 으로 이루어진 양원제이다.

상원은 귀족으로 구성된다. 상원에는 작위 가 후손에게 승계되는 귀족이 있는가 하 면, 총리가 제청하여 왕이 임명하되 후손 에게 승계되지 않는 귀족, 고등법원 판사 중 대법관으로 임명된 종신 귀족, 성직 귀 족 등 여러 귀족이 있다. 지난날 상원 의 원은 대부분 조상 대대로 의원직을 물려 받은 귀족들이었다. 그야말로 조상만 잘 두면 상원 의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상원 의원의 세 습제가 폐지되었고, 그리하여 세습 귀족 수가 크게 줄었다. 상원 의원의 수는 고정 되어있지 않는데, 2012년 12월 현재 총 759명이다.

5년 임기의 하원은 2010년에 소선거구제 직접선거로 선출된 650명의 의원들로 구 성되었다. 이들의 지역구를 보면 잉글랜드 533석, 웨일즈 40석, 스코틀랜드 59석, 그리고 북아일랜드가 18석이다. 사실상의 가장 강력한 권한은 이 하원에 있다. 하원 을 중심으로 상원이 인준하는 형식이다.


인구와 민족

영국을 이루는 네 나라는 비록 정치적 으로 단일 주권하에 있고, 영어를 공용 어로 하지만, 민족적으로 보면 구분된 다. 잉글랜드가 앵글로색슨족이 주를 이 룬다면 나머지 홈 네이션인 스코틀랜드, 웨일즈, 북아일랜드는 켈트족의 후예가 주류를 이룬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2010년 추정 영국 총인구는 62,262,000명이다.

잉글랜드는 크게 9개 지역(region)으로 나뉜 다. 2010년 잉글랜드 인구는 52,234,000 명인데, 9개 지역별로 나누어 보면 브라이 튼과 같은 도시가 있고 경제적으로도 아 주 발전한 사우스 이스트 지역에 가장 많 이 거주하고, 약 800만에 가까운 사람들 은 런던에, 그 다음에는 맨체스터와 리버 풀을 중요 도시로 하는 노스 웨스트 지역 에 많이 산다.

그런데 2011년 센서스 1) 에 의하면 2011년 3월 현재 잉글랜드 인구는 53,107,200명, 웨일즈 인구가 3,063,800명이다. 두 지역 총인구는 56,171,000명으로, 2010년에 비 해 1년 사이에 931,200명이 증가하였다.



특징적인 것은 65세가 넘는 노인 인구가 920만 명으로, 16%, 즉 6명 중 1명이 노 인이라는 점이다. 영국은 65세 이상 인구 가 총인구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전형적 인 고령사회(Aged Society)이다.

스코틀랜드의 현재 행정 구역은 32개 주 (council area)로 구분되어 있다. 북서쪽 고원 지대는 하이랜드(Highland), 남동쪽 평야 지 대는 로우랜드(Lowland)라고 하는데, 큰 도 시들은 주로 로우랜드에 있고, 하이랜드 지역에는 애버딘을 제외하면 큰 도시가 없다. 2010년 추정 스코틀랜드 총인구는 5,222,000명이며, 그 중 가장 큰 도시인 서부의 글래스고에 1,800,000명 이상이 살고, 이어 수도인 에딘버러에 60만 명 이 상이, 에버딘에 20만 이상이 거주한다.

웨일즈의 행정 구역은 22개 주로 구성되 어 있다. 웨일즈의 2010년 추정 인구는 3,006,000명인데, 수도인 카디프가 60만 이상이 거주하는 가장 큰 도시이다.

북아일랜드는 26개 구(district)로 이루어졌 다. 북아일랜드의 2010년 추정 인구는 1,799,000명인데,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항구 도시 벨파스트에는 7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


인종의 분포
현재 영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민족이나 인 종, 국적이 매우 다양하다. 2011년 센서스에 의 하면 잉글랜드-웨일즈에 사는 사람의 86%, 48,200,000명은 백인이다. 기타 민족 구성을 보면, 인도 2.5%, 파키스탄 2.0%, 방글라데시 0.8%, 중국 0.7%, 기타 아시아인 1.5%, 아프리 카 1.8%, 카리브인 1.1%, 기타 흑인 0.5%, 흑백 카리브인 0.8%, 백인 아시아인 0.6%, 기타 혼혈 인 0.5%, 흑백 아프리카인 0.3%, 아랍 0.4%, 기 타 0.6%이다. 특히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지난날의 정치 적 배경에 기인한다.

2011년 현재 잉글랜드-웨일즈에 사는 사람 중 영국에서 출생하지 않은, 즉 외국에서 출생한 사 람은 인도(694,000명), 폴란드(579,000명), 파 키스탄(482,000명), 아일랜드(407,000명), 독 일(274,000명), 방글라데시(212,000명), 나이 지리아(191,000명), 남아공(191,000명), 미국 (177,000명), 자메이카(160,000명)의 순이다. 세 계 여러 나라에서 이민온 사람들은 런던, 맨체스 터, 버밍엄, 리버풀, 슬라우, 레스터, 울버햄튼 등 에 많이 살고 있다.

2011년 현재 영국에는 우리 교민이 약 46,829 명 살고 있다. 시민권자 및 영주권자가 13,009명 에 이르며, 체류자가 약 33,820명이다. 주로 런던 에 많다.


종교지형

영국에서는 두 가지 기독교파가 국교로 인 정되고 있다. 성공회와 스코틀랜드의 스코 틀랜드 장로교가 그것이다. 국교가 있다고 해서 여타 종교를 배타시하는 것은 아니 다. 영국은 현재 모든 사람이 종교의 자유 를 누릴 권리를 가진 다종교 사회이다.

영국의 주된 종교는 기독교이지만 세계 종 교 대부분이 있다. 이슬람교, 힌두교, 시크 교를 믿는 다소 규모가 큰 공동체도 있고, 유대교나 불교와 같은 소규모 공동체도 있 으며, 신종교 추종자들도 있다. 또한 종교 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고, 모든 형태의 종교적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국에서 센서스에 종교가 포함된 것은 2001년인데,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2011년 센서스를 보자.

잉 글 랜 드- 웨일 즈 에 는 기 독 교 도 가 33,243,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59%를 차 지하여 가장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지난 10년 사이에 신도가 준 유일한 종교이며, 무려 12.4%, 약 4,095,000명이나 줄어들 었다. 그 뒤를 잇는 종교 인구를 보면, 무 슬림 2,706,000명, 힌두교, 시크교, 유대 교, 불교 순이다.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무종교 인구가 14,097,000명으로, 2001년 에 비해 6,388,000명, 비율로는 10.3% 증 가하였다는 점이다.

기독교도를 지역적으로 보면 노스 이스트 지역에 가장 많고 런던에 가장 적게 산다. 그러나 런던에는 시크를 제외한 무슬림 (1,000,000명), 힌두(411,000명), 유대교(149,000명), 불 교(82,000명) 등 대부분의 개별 종교인구가 가 장 많이 살고 있다. 시크교도는 약 30,000 명이 사는 웨스트 미들랜즈에 가장 많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 가장 많은 지역은 웨 일즈, 사우스 웨스트, 이스트, 사우스 이 스트, 이스트 미들랜즈의 순이다.

기독교 내의 신도 수 변화 양상을 보면 이런 경향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보아 국교인 성공회 교도가 지 배적이고, 프로테스탄트, 가톨릭 순이다. 또 특징적인 점은 기독교가 점차 세속화 경향 을 보인다는 것이다. 총인구에서 종교 인 구가 차지하는 비율,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가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오늘날 교 회 참여자들은 나이든 여성들이 많다.






영국 경제와 한국과의 관계

영국은 세계에서 두 손 안에 드는 경제대 국이다. 비록 지금은 해가 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 있지만, 그래도 금융산업을 비 롯한 일부 산업은 세계 어떤 국가보다 경 쟁력이 강하다. 영국의 GDP는 2조 4,526 억 달러(2012 IMF 기준)로 세계 6위이다. 1조 1,635억 달러로 세계 15위를 차지하는 우 리나라와 비교하면 두 배가 넘는다. 1인당 GDP는 38,891달러(2012 IMF 기준, 세계 24위)이다. 『포츈』지에서 선정한 2012년 세계 500대 글로벌 기업 보유 현황을 보면, 영국은 26 개 기업이 포함되어 6위를 차지하였다. 이 는 13개가 포함되어 8위를 차지한 우리나 라와 비교된다.

2011년 기준 교역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는 무선전화기, 선박, 승용차, 집적회로 반 도체, 금 등을 49.69억 달러 수출하였고, 강반제품, 의약품, 주류, 합성수지 등을 38.18억 달러 수입하였다. 영국은 우리나 라에게 수출입에 있어 대략 20-30위권의 교역국이다.

우리나라와 영국의 첫 만남은 19세기 말 이었다. 외세의 개방 강요와 조선의 개화 정책에 따라 조선은 여러 국가들과 조약 을 맺는데, 그 하나로 두 나라는 1883에 한-영 우호통상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어 진 영국과 우리의 만남도 결코 아름다운 만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계 각지에 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이 러시아 의 조선 진출에 위기를 느껴 함대를 앞세 워 전라도에 있는 거문도를 강제적으로 점 령(1885년)하였기 때문이다. 교역이 거의 없 었던 두 나라가 가까워지게 된 것은 일제 로부터 해방된 이후 1949년에 양국이 수 교를 맺고, 영국이 한국전쟁에 유엔군으 로 참여한 이후부터였다. 영국은 북한과 도 2000년 말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는 데, 2001년 7월에는 주 북한 영국대사관 이, 2003년 4월에는 주 영국 북한대사관 이 개설되었다.




문화

영국인의 문화 특성
영국인들은 기독교Protestantism 사상을 바탕 으로 하는 근면성과 정직성이 있고 실용 적이며 매우 검소한 모습을 보인다는 평 을 받는다. 오래된 것도 잘 보전하고 아껴 쓰며 허례허식이나 명분에 얽매어 쓸데없 는 낭비를 하지 않는다. 기존의 전통과 연 속성을 중시하는 보수적 성향Conservatism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혁명보다는 점진적 변화를 선호하고 참을성이 강하며 냉정하 고 과묵한 감정의 억제Inhibitions 성향도 특징 으로 꼽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변화하지 않는 영국의 상징들로는 흔히 버버리 코 트, 패딩턴 맥주, 얼 그레이 차, 런던 택시, 웨그우드Josiah Wedgwood 등을 든다. 여왕의 경우 현재 머리 스타일을 50년 간 유지하 고 있고 찰스 왕세자는 한번도 청바지 차 림으로 대중 앞에 나타난 적이 없다. 영국 통신업체 BT가 기존의 붉은색 공중전화 박스를 노란색으로 교환하려고 했을 때 조직적인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친 것도 그 러한 국민성에 기인한다.

또한 방어적인 프라이버시Privacy 중시 풍토 가 강해서 남에게 쉽게 자신의 집 방문을 허용치 않으므로 영국사람의 집은 하나의 성城(castle)이라고 부를 정도이다. 영국인을 대체로 거만하고 차갑고 쉽게 사귀어지지 않는다고 평하는 말은 이러한 특징들 때 문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영국인들은 예의바르고 친절하고 질서의 규칙을 잘 지키는 장점을 갖고 있 으며, 문학 분야에서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찰스 디킨스, 아서 코난 도일, 조앤 롤링 등의 뛰어난 작가들을 배출한 예술적 성향 도 보유하고 있다. 또한 보수적 성향과는 다른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외향성Outwardness 도 갖고 있어서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한 힐러리 경, 남극을 탐험한 아문젠 등이 모 두 영국인이었으며 대영제국 건설의 과거 역사도 이러한 외향성이 바탕이 되어 이룩 된 것이다.

일상생활에 있어서 영국인들은 규칙적인 성향Idiosyncratic이 강하다. 약속을 정할 때는 미리 상당한 시간을 두고 정하며, 휴가도 보통 1년 전쯤에 계획을 잡고 매년 같은 장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매 주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식사하는 습관, 비가 오더라도 매주 수요일에 세탁 을 하는 습관 등이 그런 유형에 속한다.


영국의 국교, 성공회(Church of England, Anglican Church)
영국국교회라고도 하는 성공회는 1534년 헨리 8세가 가톨릭 교회와 손을 끊고 스 스로 성공회 수장이 됨으로써 영국의 국 교가 되었다. 한때 열렬한 로마 교황의 추 종자였던 헨리 8세는 결혼을 6번이나 하 였는데, 자신의 결혼과 이혼 문제에 로마 가톨릭이 개입하고 교황청과 대립하게 되 자 가톨릭에서 분리하여 성공회를 영국의 국교로 만들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인 첫 왕비 커서린의 딸 메리가 왕위에 오르자, 그녀는 광신적인 가 톨릭교도여서 아버지가 세운 성공회를 부 정하고 교황권을 재확인하여 잉글 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려고 했 다. 그 과정에서 성공회와 신교도들을 무 차별 학살하였다.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558년에 메리 여 왕이 자녀 없이 죽자, 왕위에 오른 것은 헨 리 8세와 두 번째 부인 앤 불린 사이에서 난 딸 엘리자베스 1세였다. 그녀는 다시 성 공회 부활을 선언하고 가톨릭과 신교도를 박해했다. 성공회는 헨리 8세에 의해 시작 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고, 지리한 종교 분쟁도 막을 내렸다.

헨리 8세의 이혼 소송과 성공회의 탄생은 명목상으로는 바람둥이 군주의 이혼 문제 때문에 불거진 분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당시의 최강 스페인과 교황의 간섭에서 벗 어나기 위한 영국의 정치적인 종교 독립이 었다. 성공회는 구교와 신교 사이의 극 단적인 것을 지양하고 서로의 장점을 포용하려고 한다. 또한 최초의 교회 분열인 동서교회(로마교회와 정교회)의 분 열 이전의 초대교회의 신앙 을 지킨다. 성공회는 성서 의 최상성, 근본적 교리 와 신조를 강조하면서 가톨릭적 의례와 직 제 등을 유지한다.

영국국교회는 국가에 대해 지켜야 할 특정 의무를 지니면서 동시에 특권 또한 부여받 는다. 영국의 왕은 반드시 성공회 교인이어 야 하고, 교리를 준수할 것을 약속하며, 모 든 성직자들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성공회의 최고위 성직자는 30개의 주교 구 역을 관장하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14개의 주교 구역을 관장하는 요크 대주교이며, 그 밖에 런던, 더럼, 윈체스터 등을 관할하 는 24명의 주교가 있다. 대주교를 포함한 주교들은 모두 총리의 제청으로 국왕에 의 해 임명되며 상원 의원을 겸직한다.

성공회 신도는 2000년 현재 세계 166개 국가에서 약 9,960만 명에 이른다. 1990 년에 비하면 약 1,145만 명이 늘어났다. 2) 우리나라에는 1890년부터 선교가 시작되 었으며, 현재 전국에 100여개 교회, 약 5 만 명의 신도가 있다.



영국 사람들의 사랑방, 펍(Pub. Public House)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영국 어디에서나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펍Pub이다.

펍을 우리나라의 것으로 말하면 선술집 정 도라고 할 수 있다. 말이 술집이지 펍은 단 지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다. 영국 사람들 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비즈니스를 위해, 쉬기 위해, 때로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펍 을 찾기도 한다. 특히 시골의 펍은 마을의 사랑방이나 다름없다. 영국에서는 신문을 배달하지 않기 때문에 신문을 사기 위해 서는 매일 주변 가게에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펍을 통해 온갖 소식을 접할 수 있 다. 펍은 여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야 말로 펍은 사람들을 이렇게 저렇게 하나로 묶는 일상적 생활공간이다. 펍을 중심으 로 생활문화가 소통된다.

펍에서는 맥주는 물론 와인이나 쥬스 및 탄산음료, 그리고 몇 가지 음식도 판다. 그 러나 사람들이 가장 많이 마시는 것은 맥 주이다. 맥주는 비터, 라거, 스타우트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영국 사람들은 쓴 맛 이 강하고 약간 진한 색깔인 비터를 가장 즐긴다. 맥주는 대개 안주 없이 서서, 또는 둥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마시는 경우 가 많다. 우리나라 술집과 달리 웨이터가 없기 때문에 팁에 신경 쓸 필요도 없다. 날 씨가 좋을 때 펍 밖에서 마시는 맥주는 또 다른 맛을 낸다. 500cc 조금 넘는 맥주 한 잔을 들고, 안주 없이 이따금은 싼 감자튀 김을 안주로 삼아, 날씨를 시작으로 축구 나 정치 얘기를 하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영국식 당구인 스누커를 치거나 스카이 채널을 통해 축구를 보기 도 한다. 특히 라이벌 축구팀과 경기가 있 을 때면 펍은 온갖 응원의 고함소리로 들 끓는다.

펍에서 가장 많이 보는 음식은 피쉬 앤 칩 스Fish and Chips이다. 피쉬 앤 칩스는 대구나 가자미 등 흰살 생선을 기름에 튀겨서 소 금과 식초를 뿌린 피쉬와 다소 굵게 썰어 튀긴 감자를 곁들인, 영국의 가장 대표적 이고 싼 서민 음식이다. 어느 펍을 가더라 도 이 메뉴는, 가격의 차이는 어느 정도 있지만,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영국에서 서민들을 많이 만나려면 펍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펍의 출입이 누구 에게나 항상 개방되는 것은 아니다. 대개 14살 이하의 청소년은 펍에 갈 수 없으며, 주로 남자들로 붐빈다. 개방 시간은 대체 로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30분까지, 그 리고 잠시 문을 닫았다가 오후 5시 30분 부터 저녁 10시 30분 또는 11시까지 문을 연다.



 

-  출처 월간개벽 2013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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